[묵상]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4-29) - 성 토마스 사도 축일 (20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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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4-29) - 성 토마스 사도 축일 (2021.7.3.)

by honephil 2021. 7. 3.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도 불렸다(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강한 불신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성체 분배를 하다 보면 신자의 얼굴보다는 손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때때로 여기저기 갈라진 틈 사이로 기름때인지 흙먼지 이었는지 모를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손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험하게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듯 손가락의 한 마디가 없는 손도 있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붙어 나무껍질 같아 보이는 손도 있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직접 대화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느끼게 해 주는 손입니다. 성체를 건네는 사제의 손을 숙연하고 미안하게 만드는 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손과 손이 만납니다. 한 손은 십자가의 상처가 남아 있는 손입니다. 뚫린 못 자국의 아픔과 핏자국이 아직 가시지 않은 손이지만, 괜찮다며 먼저 내밀어 주는 손입니다. 또 하나의 손은 확신을 바라는 손입니다. 또다시 실패할까 두려워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손이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손입니다.

 

자신의 손짓 하나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오만과 자만의 손이며, 타인의 말과 감정을 듣지도 함께하지도 못하는 매정하고 비정한 손입니다. 그러한 두 손이 만납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손가락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상처 입고 구멍 뚫린 손에 가 닿습니다.

 

그 한 번의 만남을 통하여 토마스가 모든 것을 깨달을 수는 없었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처의 아픔이, 그 십자가 죽음의 고통이 바로 자신 때문이었음을 말입니다. 이 두 손의 만남은 어쩌면 공감의 마음일 것이고, 어쩌면 외면에 대한 미안함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 보십시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느낌을 통하여 그의 지나온 삶에 공감하고, 조금은 미안함이 깃든 사랑을 만나 보셨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

 

<성사보다 공동체>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 사도는 그들과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서야 돌아온 토마스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일주일 뒤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의 의심을 해갈시켜 주십니다. 그러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도대체 어떻게 보지 않고서 믿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면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TV 동물농장에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 출생 미스터리의 진실!’이란 내용이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완도에서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찾아갔습니다.

 

    어미 나주는 혼자만 다른 모습의 고양이처럼 생긴 새끼를 낳았습니다. 새끼를 낳을 때 주인이 보고 있었는데 30분 뒤 고양이 새끼가 한 마리 더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개가 낳았다고 믿어지지만, 아무리봐도 고양이인 것 같아서 전문기관에 유전자 검사까지 하게 됩니다.   

 

    어미는 다른 새끼들보다 작은 고양이 새끼를 더 신경 써줍니다. 어쨌건 유전자 검사는 고양이가 맞았습니다. 아마도 새끼를 낳던 그 30분 동안 어떤 고양이도 새끼를 낳았는데 밖으로 나온 자기의 새끼인 것 같아서 그것을 물어와 자기 새끼들과 함께 두었고 냄새가 같아져서 자기 새끼로 인식을 하게 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한 오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서는 좀처럼 불편해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같은 부모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고 다른 부모에 의해 키워졌다면 그 공동체에 머물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 반드시 그 구성원들의 부모를 그 공동체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기까지 그 사람을 성장시켜 준 부모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양식과 가르침으로 키웠습니다. 양식으로는 부모가 창조자임을 믿게 만든 것이고, 가르침으로는 부모의 모범을 따르게 한 것입니다. 모기처럼 자기만 아는 상태로 태어나서 공동체에서 나눔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다 이 부모 때문입니다.

 

    그러니 각자가 공동체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 부모의 모범이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이기적이었는데 자녀가 공동체에서 희생하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 형성되는 공동체 안에서는 각자의 부모인 누가 보일까요? 바로 하느님이 보입니다. 성령도 보이고 그리스도도 보입니다. 하느님은 성령이라는 양식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리스도라는 모범으로 우리를 성장시키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당신 사도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당신을 볼 수 없었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가톨릭교회는 냉담 신자를 정할 때 고해성사를 3년 동안 한 번도 보지 않는 것으로 기준을 삼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과연 합당할까요?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는 과정이지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신앙의 목적은 그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이들이 맺게 될 신앙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본당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에 참석하여 친교를 나누지 않는 사람이 진정 냉담하는 신자입니다. 그 안에서 각자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데 어린이처럼 성사에 참여하는 것만을 냉담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리옷 유다도 성체를 모셨습니다. 물론 토마스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3년 동안 냉담 신자가 아닐까요? 이미 공동체에서 떠남으로써 그들은 바로 냉담 신자가 된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모이게 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데 공동체를 떠나면 곧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영하더라도 친교를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닌 잘못된 지향으로 미사를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앙의 목적을 안다면 토마스 사도처럼 다시 공동체에 돌아왔을 때 냉담을 푼 것이고 떠나가면 냉담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더 사목적으로 적당하다 여겨집니다.

 

    신앙 공동체의 결속력은 각자가 얼마나 많이 내어놓을 수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 모두를 공동체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아스는 재산의 반만 가져다 바쳤습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란 뜻입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인 사람이었다면 하느님 가족 공동체를 위해 다 바쳤어야 옳습니다. 그래서 그는 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좀 심한 내용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이는 신앙 공동체에 머물 수 없다는 큰 메시지를 줍니다.

 

    그러니 공동체는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는 각자의 아버지인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초대 교회에서는 공동체 덕분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증가하였습니다.선교는 우리 공동체의 사랑을 통해 그 속에서 우리 부모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https://youtu.be/JCGCw8WGA9E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4-29) - 성 토마스 사도 축일 (2021.7.3.)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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