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하루를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을 전부 알지는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자신이 가진 간단한 정보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판단합니다. 그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느 학교에 전공은 무엇인지 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어디에서 살고 생활환경이 어떠한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에 따라 미리 그를 판단합니다. 누군가를 깊이 알아 가며 인격적인 만남을 바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만남을 이어갑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그러한 시선으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만납니다. 바리사이들은 세리인 마태오를, 민족을 배신하고 돈만을 쫓아 살아가는 파렴치한으로 판단합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 또한 죄인이며 배신자로 결론 내립니다.
그러한 선입관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조차도 그들과 같은 부류로 판단해 버립니다. 그들의 선입관에는 자신은 깨끗하고 의인이라는 자만심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도, 마태오도, 그리고 다른 세리와 죄인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 선입관과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지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그리고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마태오에게 다가가시어 그와 함께하십니다. 색안경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가난함에 함께 자리하십니다. 슬픔과 두려움, 고민과 갈등에 휩싸인, 그리고 병들어 있는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자비이며,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로 그를 쉽게 판단하고 그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따져 가며 그와 함께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만남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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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가 필요로 하는 예수, 유다가 필요로 하는 예수>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불림을 받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와 같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기분이 상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예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렇다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해 줄 왕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중에 마태오도 예수님이 필요했고 가리옷 유다도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필요하다는 말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예수님이 필요했지만, 마태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와 유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는다면 분명 아이가 필요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오처럼 아이가 필요한 부모와 유다처럼 아이가 필요한 부모가 다릅니다.
영화 ‘4등’(2015)의 내용입니다. 준호는 만년 4등을 하는 수영선수입니다. 준호 엄마는 어떻게든 준호를 1등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왕년에 아시아 신기록까지 경신한 한 코치를 소개받습니다. 그런데 코치는 돈은 받으며 아이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가 놀다가 지쳐서 코치에게 수영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아이 수영하는 모습을 본 코치는 가르칠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코치의 가르치는 방식은 ‘구타’였습니다. 코치도 사실 선수 시절 맞는 게 싫어서 선수를 그만둔 것이었는데 지금은 아이의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준호가 몸에 멍이 든 상처가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지만 엄마는 밤에 살짝 아이의 몸을 들춰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자인 아빠가 이것을 알아버렸습니다. 이때 아이는 대회에서 2등을 합니다. 그렇더라도 아빠는 아이를 계속 구타하면 기사를 내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이의 아빠는 선수시절 코치가 맞을 때 기사를 내어달라고 부탁하자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 거 아니냐며 그 청을 거절했던 바로 그 기자였던 것입니다. 코치는 아빠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때립니다. 아이는 더는 못 버티겠다며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엄마는 크게 화를 내며 준호를 본척만척합니다.
준호의 어머니는 이제 준호 동생에게 기대를 겁니다. 동생이 엄마의 희망이 된 것입니다. 준호는 자신이 맞은 대로 자기 동생을 때립니다. 그리고 자신도 다시 수영하겠다고 코치를 찾아갑니다. 코치는 엄마 생각하지 말고 혼자 하면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아이는 죽을힘을 다해 1등을 합니다. 엄마는 기뻐합니다. 그런데 준호는 2등 했을 때는 기뻤지만 이상하게 1등을 했는데도 기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준호와 엄마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엄마는 준호를 통해 수영 잘하는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 준호가 필요합니다. 이 필요함은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 것과 같습니다. 필요로 한 대상이 그 필요한 대상이 아닌 그 대상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이나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 민족의 해방이나 돈과 권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준호에게 엄마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경쟁이라는 고통 속에서 구해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냥 엄마만 있으면 되는 그런 필요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마태오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 이유입니다. 마태오는 돈과 권력, 쾌락에 물들어있는 자신으로부터 구해줄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유다가 돈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했다면, 마태오는 그 욕심을 버리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그 욕심들을 없애기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고 다 그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어떤 유튜브에 한 영재 아이가 아버지에게 파리채를 던지는 충격적인 장면도 있습니다. 똑똑했던 명이라는 아이가 그렇게 부모와 동생에게까지 문을 닫아버리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 이유는 아이에게 보살핌을 주어야 했을 때 부모가 그렇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집안이 어려워져 부모는 장남인 명이에게 공부를 강요하였습니다. 성적이 좋지 못하면 몸에 상처가 날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것에 대한 보복을 받는 것입니다.
[출처: ‘아버지에게 파리채 던지는 영재, 그 이유는?’, 유튜브 채널, ‘SBS STORY’]
아이를 이용하려고 하며 필요로 했던 것이 사랑이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욕심들이 사라질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유튜브에 이런 실험 카메라 동영상도 있습니다. 안과에서 아들과 어머니, 의사 선생님이 짜고 아들이 실명 단계에 있어서 각막을 이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가족 중 누군가가 각막을 이식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 한쪽, 어머니 한쪽 이식해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합니다. 아들은 감동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눈이 그렇게 안 좋게 태어나게 만든 것에 대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출처: ‘아들의 갑작스러운 실명 소식, 그리고 아버지의 한 마디’, 유튜브 채널, ‘엔스크린’]
살 만큼 살았고 더는 욕심내며 살지 않게 각막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욕심을 끊을 아들을 바라는 마음이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때 마태오의 참사랑일 수도 있고 유다의 거짓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기실현을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기가 되려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되려고 말입니다. 세상 욕구를 끊기 위한 마음이 아닌 이상 그리스도를 바라는 마음은 다 가짜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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