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마태오 10,17-22)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20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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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마태오 10,17-22)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2021.7.5.)

by honephil 2021. 7. 5.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이날을 ‘신심 1등급’으로 정하고, 주일과 겹치더라도 성대하게 거행하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가끔 삶의 길을 잃고 헤맬 때가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그 생활에 적응하게 되고, 적응된 일에만 익숙해져 쉽게 판단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실망스러워 절망하기도 하고, 좋은 결과를 얻었더라도 피곤하고 힘든 과정을 다시 걸어야 한다는 두려움에 새로운 시도를 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를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위 사람에게 상처받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였을 때, 열심히 한 일에 대해서 인정받지 못하였을 때,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이들이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우리는 실망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집니다. 또한 그 길을 가고자 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사제로 살아 온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러한 장벽과 걸림돌에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길을 잃고 헤매야 할지 두려움이 앞섭니다. 넘어지고 쓰러졌을 때, 또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그런 실망과 후회를 견디어 낼 수 있을지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하고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전하는 삶 자체가 어쩌면 처음부터 넘어지고 채찍질당하며,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견디어 내라.’, ‘걱정하지 마라.’ 하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지만, 그래도 늘 걱정이 앞섭니다.

 

십사 년 전 오늘, 저는 이 길에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어떠한 사제가 되겠다는 다짐이나 창대한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던 첫 마음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걱정과 두려움이 닥치더라도 당당히 맞서 나아가려 합니다. 견디기 쉽지 않을 때마다 첫 마음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첫 마음으로 삶의 어려움을 견디어 내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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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으로 평안을 잃을 것인가?>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를 거행합니다. 만약 천국이 없다면 김대건 신부님의 일생은 그냥 고통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릴 적 마카오로 가며 수 없는 육체적 고생을 했고 공부하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그러했으며, 부모와 가족의 순교로 마음고생도 이에 못지않았습니다.


    사제로 서품되어 조금은 편안하게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겠지만, 순교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김대건 신부님은 높은 벼슬과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겠다는 회유를 뿌리치고 순교의 길을 택합니다. 한순간도 편안해 본 적이 없는 삶이었지만 마지막까지 편안함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힘들기만 하셨을까요? 마지막에 조금도 편안하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사실 그동안 충분히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루의 마지막도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안했을 때 잠이 잘 오는 것이 아닐까요? 종일 쉬고 놀고 방탕하게 살았다면 오히려 불안해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편한 일과 힘든 일, 두 개가 앞에 놓여 있다면 항상 좁고 험하고 힘든 일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사실 편할 때 더 고통스럽습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행복해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위해 피를 흘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받는 시기에 더 신앙이 강해집니다. 자유롭고 편안하게 신앙생활하는 지금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먼 나라 이야기를 넘어서서 ‘왜 그 고생하며 신앙생활을 한 거야?’라며 의아해합니다. 고통의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도 가톨릭 국가로서 영국의 심한 박해를 450여 년 받으면서도 신앙을 잘 지켰지만, 소득이 높아지며 편안해진 지금은 다른 유럽 국가와 별반 차이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낙태법도 허용되었고 젊은이들은 성당을 떠났습니다. 삶도 신앙도 편안해지려고 하면 죽습니다.

 

    ‘쓰레기로 2층까지 꽉 찬 트레시 홈’이라는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주택가 한가운데 이층집 천장까지 쓰레기로 꽉 찬 이 모습은 실제로 보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집주인은 왜 쓰레기를 모으는 것일까요? 모두 다 필요하다 생각하니 모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모든 이상한 행위 뒤에는 항상 ‘죄책감’이란 것이 있습니다.

 

    집주인의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여 아들이 원하는 것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쓰레기를 치울 때 아들은 필요한 것들인데 왜 치우느냐고 짜증 섞인 말까지 합니다.

 

    아버지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들을 고생시키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고생하면서 성장하게 창조되었습니다. 때가 되었으면 밖으로 떠밀고 혼자 힘으로 고생하며 살아가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부모가 해야 할 자녀에 대한 의무일 것입니다. 세상에 왜 이런 고통이 있느냐고 말하지만, 고통 없이는 어떠한 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양팔은 잃었지만 삶은 잃지 않았다’라는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전기 감전 사고로 양팔을 잃은 분이 계십니다. 자신이 만든 의수로 자신이 만든 자전거에 폐지를 싣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루를 열심히 일해도 버는 돈은 5천 원 이하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표정은 매우 밝습니다. 집에만 있으라는 말을 뒤로하고 뭐라도 하고 있다는 보람 때문입니다.

 

그분을 보며 주위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합니다. 이분은 말합니다. 

 

    “난 팔을 잃었지 의지까지 잃은 것은 아닙니다.”

 

따님도 이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같이 다닙니다.

   

    덧글로 달린 몇 개의 글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팔 두 손 멀쩡하여 지금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는 이 두 팔 두 손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힘들다고 엄살떨고 있는 나를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존경합니다.”(Eugene Johns)

 

    “땀 흘려 번 돈 4800원에 저렇게 환히 웃을 수도 있는 모습이 새삼 날 부끄럽게 한다.”(미또)

 

    “아저씨는 대기업의 CEO보다, 빌 게이츠보다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한 어떤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입니다. 죄송하고요 감사합니다.”(한휴머)

 

    이분이 인터뷰하실 때 뒤에 성모상이 보였는데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이런 분이 현시대의 김대건 신부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주선에서 오랜 시간 있으면 건강이 좋을까요? 그곳은 기압이 낮아서 몸을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육이 약해지고 골밀도도 약해져서 우주에서 너무 오래 머물면 몸이 망가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힘들지만, 땅을 딛고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야 근육도 생기고 뼈도 튼튼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약해집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제일 힘드셨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편안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편안함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되시었습니다.

 

    편안함에 물들지 맙시다. 마치 개구리가 들어있는 물을 조금씩 가열하면 개구리는 뜨거워지는지도 모르고 죽는 것처럼 편안함은 우리를 알지도 못하게 죽입니다. 자꾸 몸을 불편하게 해야 하고 운동해야 합니다.

 

    신앙도 고난 속에서 더 성장합니다. 하늘에서는 이 세상에서 성장시킨 신앙만큼 상을 받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님이나 다른 순교자들을 안됐다고 보지 말고 부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6개월간의 긴 여정 끝에 마카오에 도착해서 세 명의 조선 신학생이 놀랐던 것은 건물이나 전례의 완벽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롭게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지금 교회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면 우리 사회 분위기가 편안함을 선택하여 죽어가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9z6WrGaDZAc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마태오 10,17-22)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2021.7.5.)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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