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마태오 8,28-34) -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202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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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마태오 8,28-34) -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2021.6.30.)

by honephil 2021. 6. 30.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8-34
예수님께서 호수 28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29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30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31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3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가르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졸라 대자 하느님께서는 사라의 부탁을 들어주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대로 행동합니다. 그 결과 하가르와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하느님과 사라가 너무 냉정해 보입니다. 그 냉정함은 호칭에서 드러납니다. 사라는 “저 여종과 그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녀에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여종의 아들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이스마엘을 ‘네(아브라함) 아들’이 아니라 “그 아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에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하느님과 사라에게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는 한 것일까요?

 

창세기의 저자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기 전에 태어났음에 주목합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이전,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사악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가 새로운 이름을 얻은 뒤에 얻게 된 아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상속을 약속받은 인물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사악입니다(창세 17,19 참조). 오늘 독서는 가족 간의 갈등을 전해 주는 냉정한 가족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 약속이 바탕이 된 상속에 위협이 되는 상황을 하느님께서 해결하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 항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냐고, 계시기는 한 것이냐며,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처지이고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계획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는 그분의 계획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의도가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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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언제부터 악이 되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마귀 들린 두 사람을 치유하시는 내용입니다. 가다라인들은 로마인들을 위해 돼지를 치는 실질적인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돼지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은 돼지 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러자 그 돼지 떼가 언덕을 내리달려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가다라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재산을 잃게 만든 예수님을 쫓아냅니다. 실상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 즉 재물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돼지가 곧 마귀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돼지는 본래 마귀 들린 것과 같은 악한 동물일까요? 아닙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돼지 자체로는 나쁜 동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떠나가게 만들 때는 나쁜 동물이 됩니다.

 

    돈은 본래 나쁜 것일까요? 돈은 나쁘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가족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습니다. 돈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몰아내게 만드는 원인이 될 때는 마귀 들린 것과 같이 됩니다.

 

    그렇다면 재물이나 명예, 음식 등은 언제부터 예수님을 몰아내게 할까요? 물론 통제가 되지 않을 때부터는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이니 악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통제가 되지 않을까요?

 

    영화 ‘오만’(2019)의 내용입니다. 현우는 한 건설자재 영업회사의 막내입니다. 그는 선배들과 함께 매일 술자리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세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세희도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는 현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좋은 관계가 유지되던 때 세희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현우는 거기서 그만두려 합니다.

 

    하지만 다시 술자리에서 세희가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질투를 느낍니다. 그래서 세희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상처 주지 않겠다며 다시 시작해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세희의 빚을 다 갚아줍니다. 세희 딸도 아저씨가 싫지 않은 눈치입니다. 그들은 동거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회사 말단 직원의 월급으로는 이미 아이까지 있는 여자를 책임지기는 버거웠습니다. 현우는 밤에 대리운전을 하고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여 일합니다.

 

    그러나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서류를 잘못 올려 회사에서 권고 해직을 당합니다. 세희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던 현우는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 보려 하지만 돈에 대한 압박이 심해 오고 세희는 다시 빚을 집니다.

 

    여기에서 서로 싸움이 오고 가고 현우는 세희의 뺨을 때립니다. 이때 자신이 그렇게도 미워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보게 됩니다.

 

    둘은 다시 남남이 되었고 현우는 다행히 다른 직장에 취직합니다. 우연히 길에서 세희와 그녀 딸의 뒷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이젠 덤덤합니다. 자신과 맞지 않았던 사람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왜 영화 제목이 ‘오만’일까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겠다는데 그것이 무슨 오만일까요? 그러나 그것은 오만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 오만입니다.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하면 그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되는대로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목표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결혼도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돈도 벌고 그리스도 때문에 열심히 살면 문제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이 세상 것은 내가 목표를 정할 때부터 악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목표액이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들어간 돼지는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목표를 정해놓으면 그것은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악마가 되어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잊는 것이 ‘오만’입니다. 영화 ‘리얼 스틸’처럼 만약 내가 만든 로봇이 목표를 갖게 된다고 생각해봅시다. 로봇은 주인의 명에 따를 때야만 생존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로봇이 목표가 있다고 주인을 버리게 되면 주인은 더는 그 로봇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로봇은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에게는 주인이 필요하고 주인이 허락해주면 갖고 그렇지 않으면 갖지 않는 삶이 가장 적당합니다. 이것이 악이 끼어들어 자신을 망치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 뜻 외에 다른 목표를 갖지 맙시다. 그것이 결국은 하느님을 잃게 할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임을 잊을 때 오만이 발생하고 그러면 목표가 세워지고 그 목표 안에 사탄이 개입하여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버리는 이유가 됩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 옥합을 깼습니다. 부자였지만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 돈은 악이 아니라 선한 것이 됩니다. 물론 돈이 있어야 자녀도 키우고 헌금도 내고 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하되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추구하는 것에 악의 기운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https://youtu.be/HBsk9kIDEeM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마태오 8,28-34) -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2021.6.30.)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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