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오 9,1-8) -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20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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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오 9,1-8) -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2021.7.1.)

by honephil 2021. 7. 1.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작년 한 해는 코로나19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사도, 성사도, 다른 이와의 만남도 모두 조심스럽고 위험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방역 단계가 낮아져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이제는 해야만 하는 일마저도 귀찮아져 버렸습니다.

 

살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많습니다. 게으름과 귀찮음, 나약함 때문이거나,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경계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 보았자 결과는 같다고 생각하며 먼저 포기하고 절망해 버리는 패배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때때로 우리는 여러 핑계로 움직이지도 나아가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온몸이 마비되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평상에 누워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열정도 없이 그저 누워 있습니다. 그런 그를 위하여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합니다. 평상을 들고 예수님께 다가갔고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희망과 열정을 보여 주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움과 패배감은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자신이 더 피곤해지지 않기 위한 욕심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까 염려하여 병자들을 멀리하였던 바리사이의 죄와 같을 것입니다. 나태함, 두려움, 절망과 포기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일어나 걸어가는 것’, 그것이 죄에서 해방되는 또 하나의 발걸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와 함께 내가 걸어 주겠다. 함께 일어나 가자.”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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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모독하는 법: ‘다’ 주실 수 없다고 말할 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보시며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얘야!”는 영어로 하면 ‘Son’, 곧 “아들아!”라고 부르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이시면서 아버지로서 자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는 오류가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언가 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실 수 있고 그 사람이 되시어 행하시는 모든 권한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그를 치유하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권한을 예수님만이 아니라 교회도 행사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고 사실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하면 거의 신성 모독죄를 지은 것처럼 나무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신성까지 ‘다’ 주시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9살 아이가 피아노 음악이 나오는 영화를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친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바로 ‘영재발굴단’에 나왔던 배용준이란 아이입니다. 힘든 가정형편에도 엄마가 팔지 않고 둔 낡은 피아노는 용준이가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는 정식적인 피아노 교육을 받게 해 줄 재력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살짝 ‘입양’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의 능력을 펼쳐 줄 능력이 되지 않는 것에 너무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음악 시디도 남이 버린 것을 주워와서 듣고 그대로 따라 치는 연습을 합니다. 장난감도 옷도 새것을 사 준 적이 없고 다 주워다 씻고 빨아서 아이를 키우는 형편입니다.

 

    아이는 천재인데 엄마는 아이를 뒷받침해 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입양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에게는 아이에게 생명도 주고 싶지만 자기 생명이 아니라면 아들을 다른 부모가 키우게 하고 싶은 마음마저 있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입니다.

 

    물론 아이는 펄쩍 뛰면서 그러면 자기 죽어버릴 것이라 합니다. 아이는 엄마가 자기 목숨과 같습니다. 아이는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피아노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준이는 피아노를 치기 싫어합니다. 피아노 때문에 학교에도 못 가고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엄마를 위해 칩니다.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1년 후 엄마는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픈 엄마를 위해 죽도록 하기 싫은 피아노를 칩니다. 엄마는 아프다가도 용준이 음악 소리만 들으면 통증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용준이는 피아노를 멈출 수 없습니다.

 

    엄마는 자신이 없으면 용준이를 누가 돌봐주느냐며 걱정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 용준이의 미래만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용준이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이제 밥도 차리고 빨래도 하며 가정 살림을 돕습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태어나, 저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용준이었습니다.”

 

    용준이는 말합니다.

 

    “엄마는 ‘심장’이에요. 심장이 없으면 죽으니깐.”

 

용준이는 콩쿠르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으로 대상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남기고 떠납니다.

 

    용준이는 울지 않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습니다. 그러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기에 다시 피아노를 칩니다. 예원학교 2학년으로 꿈을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용준이를 자신의 집에서 키우며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김지선 선생님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결국, 엄마의 바람대로 엄마는 떠나고 더 능력 있는 분이 용준이를 맡아 키워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목숨으로 아이를 그렇게 봉헌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다른 집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말했을 때 아이가 얼마나 상처가 컸을까요? 그러나 엄마가 자기를 미워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다만 용준이는 엄마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엄마 자신을 원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다 줄 수 있고 자신이 주지 못하는 것까지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능력이 안 되어 아이를 입양시키려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내 생명까지도 다 내어주고 그것도 모자라면 다른 것도 찾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께 “그분은 이러저러한 것은 주실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요?

 

    개신교는 교회에 하느님께서 주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포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물론 살과 피를 주시는 성체성사도 포기했습니다. 인간에게 그 정도까지 주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도 사랑하면 자신의 능력 이상을 주고 싶어 하는데, 사랑 자체이신 분이 어떻게 어떤 것은 주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바로 그분의 심장입니다. 심장을 내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면 신성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신성을 받아 우리가 본성상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 무슨 신성모독이 되겠습니까?

 

    예전에 성탄 자정미사가 끝나고 복사 아이들에게 집에 들어가며 떡볶이 사서 먹으라고 만 원짜리 몇 장을 주었습니다. 다음 날 그들은 그 돈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이 사 주시고 저에게 다시 가져다주라고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준 돈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을까요? 저는 그 정도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것을 주실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든 것을 다 주시고도 모자라 아마 더 주실 수 있는 것이 있으셨다면 그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것도 포기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고 또 하느님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고 찬미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처럼 할 수 있다고 믿는 자녀가 효도하는 자녀입니다. 

 https://youtu.be/BUtltb2CCQY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오   9,1-8) -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2021.7.1.)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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