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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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일곱 개의 빵으로 사천 명을 배 불리신 그 자리에 바리사이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광야와 같은 그곳에서 군중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만나로 굶주림을 채우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늘에서 온 표징이었음에도 그것을 보고도, 그것에 관해서 듣고도 표징이라 여기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런 일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내 배우자가 가족들을 아끼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이렇듯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족들과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표현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정녕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나의 배우자가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 정말 없었습니까? 어쩌면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 채 편견과 선입견의 틀 속에 갇힌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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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서는 좋은 의도가 전부다>
복음: 마르코 8,11-13
왕이 한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신하 두 사람이 죄인을 감옥으로 호송했습니다. 절망감에 빠진 죄수는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이 못 된 왕아!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 평생 허우적거려라.”
이때 한 신하가 그의 말을 막았습니다.
“여보시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죄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소.”
신하들이 돌아오자 왕이 물었습니다.
“그래 죄인이 잘못을 뉘우치던가?”
그때 죄수의 말을 가로막던 착한 심성의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예. 게다가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폐하를 용서해 달라고 신께 기도 했습니다.”
신하의 말에 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죄수를 살려주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습니다.
그때 다른 신하가 말했습니다.
“폐하. 아닙니다. 그 죄수는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폐하를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 신하를 나무랐습니다.
“네가 한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나는 저 사람의 말이 더 마음에 드는구나.”
“폐하, 어째서 진실을 마다하고 거짓말이 마음에 든다 하시는 겁니까?”
왕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사람을 살리고 싶은 좋은 의도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네 말에는 악의가 있구나.”
왕은 결국 죄수의 목숨을 살려 주었습니다.
물론 좋은 의도가 있다고 해서 거짓말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누군가를 판단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진실과 거짓보다는 사람 마음 안의 의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했더라도 나쁜 결과가 나올 수 있고, 나쁜 의도로 했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판단할 때는 외적인 결과보다는 그 사람 안에 좋은 의도가 있는지, 나쁜 의도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그러면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임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그러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실천을 안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좋은 의도만 있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 표징이 부족한 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표징 자체이십니다. 표징 자체이신 분에게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다 키워놓았더니 아이가 “당신이 내 엄마라는 것을 증명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켜 우리 양식이 되게 해 주신 생명의 양식 앞에서 “당신이 아버지인 것을 증명해 보시오!”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들을 떠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들은 좋은 의도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에게는 어떠한 표징도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을 때, 어머니에게 “당신이 저의 어머니임을 증명해보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더 세세히 뜯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 하시는 모든 행위가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하시는 행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어머니를 잘 관찰했던 것은 어쩌면 제가 좋은 자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좋은 의도만 있으면 하느님은 그 의도를 채워줄 모든 은혜를 이미 다 주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의도가 있습니까? 그러면 더 이상 다른 표징은 요구할 필요도 없게 많은 표징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운전할 때 목적지가 분명하면 그 목적지를 표시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수많은 표징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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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말씀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마르 8,11-13)
유리 겔라를 아시나요? 한때 시대를 풍미하던 초능력자로 익히 알려진 인물입니다. 물론 그 이후 그의 사기 행각이 들통나는 바람에 이제는 전세계를 농락한 희대의 인물로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몇 번인가 우리나라도 방문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었죠.
아직도 기억납니다. 추석인지 설인지 명절이라 많은 친적들이 모여 있던 날, TV 앞에 모여서 그가 보이는 초능력을 호기심과 기대감에 가득 차 보고 있었죠. 그가 제안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초능력이 잠재되어 있노라고, 지금 당장 해보라고 말이죠. 숟가락을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구부러지게 만드는 소위 스푸닝. 부엌에서 숟가락 가져다 저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유리 겔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자기 눈을 바라보면서 집중해서 숟가락을 문지르라고 주문합니다. 우리는 다시없을 진지함으로 숟가락을 문질렀습니다. 그런데 진짜 초능력, 기적이 일어납니다. 제 사촌 여동생이 쥐고 문지르던 숟가락이 휘어져 버렸던 것이죠. 집안에서는 세상에 이런 일이, 감탄이 쏟아졌습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하구나, 연신 놀라워합니다. 기적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적인가요? 멀쩡하던 숟가락 못쓰게 된 기적이죠.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마음이 이해안가는 것은 아닙니다. 보여주면 믿겠다-이런 식의 태도가 그리 이상한 것만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후 의심과 회의에 쌓여있던 토마스 사도에게 ‘보지 않고 믿는 것은 행복하다’고 오죽하면 말씀하셨을까요. 또 실제로 예수님의 치솟는 인기는 그분이 수많은 치유, 구마, 기적을 보여주셨던 것에도 일정 부분 기인하기도 합니다. 신적 능력을 보여달라, 우리가 당신을 믿기 위해서는 믿을만한 증거를 제출하라는 요구.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사도들과 그 이후 교회 안에서도 기적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며 소위 ‘은사 중지론’이라는 주장에 의하면 사도 시대 이후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내리지 않으신다고 보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죠. 은사,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는 하느님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았다고 저는 봅니다. 여전히 당신은 우리 세상에 보여주실 일이 있고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적 혹은 표징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만일 기적이 일어났다 해도 반드시 그것이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연결되느냐면 꼭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죠. 기적은 마술도 초능력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놀라우신 그분의 일하심에 대한 경외와 순종으로 귀결될 때 표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적을 행하는 이에 대한 왜곡된 숭배와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는 탈주하는 욕심이 뒤엉키게 되고 맙니다.
요한 바오로 교황님 방한하신 어떤 성당에서 일어난 일이 아직 기억납니다. 교황님 방문하신 후 그 성당에서 기도하던 한 신자가 기적을 목격합니다. 성당 제대에 예수님의 성면, 그분의 얼굴이 새겨졌다는 것이죠. 그야말로 구름떼처럼 인파가 몰려듭니다. 예수님을 친견하려는 열정에 불탄 이들이, 신자만이 아니라 소문 듣고 온 이들까지 성당 바깥으로 한도 없이 줄을 서서 보려고 합니다. 실제로 그 제대를 보면 예수님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애매한 무늬기 나무 제대에 비추긴 하더군요.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요. 그것이 기적이었다 믿는다 해도 그 일로 변화된 사람 있다는 이야기는 과문해서인지 듣지 못했습니다.
브리지 메케나 수녀님이라고 치유의 은사를 지녔다고 평가받던 분이 계시죠. 그분이 하신 일갈이 기억납니다. ‘기적은 일어납니다. 단 예수님과 함께 일 때만!’ 중점은 어디에 있나요? 기적이 일어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인가 아닌가입니다. 우리는 기적이 있는가 없는가에 초점을 맞추지만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내 연약한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적, 표징은 있을 수 없지 않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내가 주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심지어 따라가고 싶다는 기특한 생각도 하게 하시다니, 이것이 기적 아니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적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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