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연중 제5주간 토요일 (20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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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연중 제5주간 토요일 (2020.2.15.)

by honephil 2020. 2. 15.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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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단어가 있습니다. “사흘”입니다. 성경에서 사흘이 가장 중요하게 쓰인 대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에 부활하시기까지의 기간일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예수님과 닮아 있습니다.


군중은 사흘 동안 먹을 것도 없이 예수님 곁에 있다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길에 쓰러져 죽을 곤경에 놓였던 이들이 다시 살아나게 된 셈입니다. 곧 죽음과 부활의 도식 안에서 이 군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닮은 군중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다음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어떤 면에서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미리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연중 제5주간 목요일 복음에서 우리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이야기를 통하여 ‘부스러기 은총’과 ‘빵의 은총’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곧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에게 내리는 부스러기 은총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빵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되새겼습니다.


바로 이 점에 비추어 오늘 복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빵의 은총을 얻고 참생명을 누리려면 ‘사흘’이라는 숫자로 상징되는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정신이 없으면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신다 하여도 참 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해야 비로소 빵의 은총에 더하여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찬 은총 또한 누릴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일곱 광주리의 은총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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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걱정만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깝다>
 
복음: 마르코 8,1-1

부활절을 앞두고 한 사람이 걱정 많은 표정으로 신부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너무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없는 것이 많아 골머리가 아픕니다. 못 살겠습니다.” 신부님은 무슨 근심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부활절이 다가오는데 헌금 낼 돈도 없고 당장 생계를 위해 먹을 것을 살 돈도, 자신의 것은 물론 아내 옷, 자녀 옷을 살 돈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물었습니다. “헌금은 얼마를 내고 싶어요?” “5천원입니다.” “오늘 식재료비는 얼마쯤 들어요?” “1만원이요.” “형제님 옷은?” “5만원이요.” “아내 옷은?” “10만원이요.” “자녀 옷은?” “3만원이요.” 이 말을 듣고 신부님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제 형제님은 하느님께 195,000원을 달라고만 청하세요. 부활의 가장 큰 의미는 나의 아버지가 하느님인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인데 뭐가 걱정이세요.”
 
오늘 복음은 빵 7개로 광야에 나온 백성 4천 명을 먹이고도 7광주리나 남은 기적을 보여줍니다. 누가 봐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탈출기에서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으로 새로 창조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은 창조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광야로 나온 당신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가나안이라는 안식으로 이끄십니다.


이 과정에서 광야에 나온 백성의 자격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대책 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사흘 동안이나 광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 없었다는 것이고 새로운 당신 백성으로 창조되지도 않았을 것이란 말도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들입니다. 생계걱정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이 생계걱정이 우리가 참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데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지 모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연합군은 전쟁고아들을 위해 막사를 제공하여 그들을 적당히 정착시킬만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자라고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사의 장교들은 아이들이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당황했습니다. 장교들은 왜 고아들이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지 심리학자들에게 그 문제를 의뢰했습니다. 마침내 그 심리학자들은 매일 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늘어선 침대 사이로 한 사람이 다니면서 아이들의 손에 작은 빵조각 하나씩 쥐어주게 했습니다. 매일 밤 빵조각을 쥐는 일로써 하루를 마감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며칠 안 되서 그들은 밤새도록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낮 동안에 충분히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 가진 것을 즐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손에 빵조각을 챙겨 쥐고서야 그들은 적어도 그 다음날 아침 식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됨을 알고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빵 한 덩이씩을 쥐어주십니다. 당신께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생계걱정에서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엘론 머스크는 돈을 잃는 것이 두려워 투자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한 달을 30달러로 살아보는 실험을 했습니다. 한 달을 3만원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모든 재산을 투자할 수 있었고 지금의 테슬라를 만든 것입니다.

빵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우리 손에도 내일 먹을 빵이 주어져있습니다. 생계에 대한 걱정은 마치 가시나무처럼 우리 숨통을 조여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이들은 생계걱정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생계걱정만 하다 죽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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