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은 형제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 터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형제는 전례서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알파벳의 슬라브 말로 번역하였다. 둘은 체코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파견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로마로 돌아간 두 형제 가운데 치릴로 성인은 수도 서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9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메토디오 성인은 교황 특사로 모라비아에서 활동하다가 885년 무렵 선종하였다.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단 한 번이 아니라 여섯 가지 행위를 통하여 고쳐 주십니다. 이를 살펴볼 때 우리도 영적으로 더욱 잘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소음이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 침묵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신 이유는, 침묵이 더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이는 귀를 열려는 행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귀를 열고 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그저 기도서에 나온 기도문을 줄줄 읽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기도란 ‘말함’보다도 ‘들음’이 핵심입니다.
셋째, 침을 발라서 혀에 손을 넣으십니다. 이 행위는 마치 어린아이를 위하여 엄마가 먹을 것을 잘게 씹어서 먹여 주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듣고, 이를 마음에 새기도록 영적인 힘 곧 성령을 집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정화되고 우리는 새 힘을 가질 자세를 갖춥니다.
넷째, 하늘을 우러러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단둘이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다섯째, 한숨을 내쉬십니다. 우리의 처지를 깊이 공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 다음, 우리의 처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파타!”라는 말씀을 통하여 비로소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리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가 말을 제대로 하도록 치유하시고서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쓸데없는 이야기,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말은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처럼 여겨지더라도 소리 내지 말고 침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귀와 입과 마음이 열린 사람이 지녀야 할 자세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갖추기 위하여 위의 여섯 단계를 다시금 되새깁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
<주님께 받은 은총이 자기자랑이 되지 않게 하라>
복음: 마르코 7,31-3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 ‘기탄잘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수여, 말해주렴, 누가 그대를 가두었는지?”
“그것은 내 주인이 옵니다.”
죄수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으론 누구보다도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보물창고에는 왕에게나 어울릴 돈을 모아 놓았지요. 그런데 깨어보니 나는 보물창고에 갇힌 죄수가 되었더군요.”
“죄수여, 말하렴. 누가 이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을 만들었는지?”
“그것은 나였어요.”
죄수는 말했습니다.
“내가 이 사슬을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나는 내 불굴의 힘으로 온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이 사슬로 세계를 사로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이윽고 사슬이 다 만들어져 끊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하게 되자 이 몸은 사슬에 꽉 잡혀 매여 있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자만은 폐망의 지름길이라는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더 겸손해지려고 노력하기 위해 저런 글들을 남겼습니다.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천상 은총을 받는 우리들도 명심해야 할 사실입니다. 자칫 은총이 내가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았다고 자만하여 그 은총이 오히려 저주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손을 얹는 행위는 축복을 주는 예식과도 같은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얹는 대신 당신 손가락을 두 귀에 넣으셨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열려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행위는 ‘성령’과 관련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령의 상징으로,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물, 기름 부 음, 불, 구름과 빛, 안수, 손가락, 비둘기, 숨 등을 들고 있습니다(694-701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시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병자를 치유하셨지만 어쨌든 그 힘은 당신 몸에서 나오는 성령의 힘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당신 죽음을 통해 나오시는 힘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성령을 받아 마셨다”(1코린 12,13).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또한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이시며, 이 생수는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94항)
다시 말해 우리가 받는 은총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오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공로가 있어서 당연히 받는 품삯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칫 은총을 받고 그 은총이 자신의 공로에 의한 것인 양 자랑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처음엔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받은 은총을 자꾸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 은총을 받은 것처럼 은총을 자신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받은 은총이야 변함이 없을 수는 있어도 영혼은 그 받은 은총 때문에 오히려 더 상태가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예는 사울이나 다윗, 솔로몬 등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고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예수님의 명령보다 더 옳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은총이 독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저와 같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이런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어느 순간에 주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과 제 자신을 높이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뜨끔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나의 이름이 빛나게 하며 살았구나.’를 느끼며 정신 차리려고 합니다. 역시 나를 돌아보는 데는 기도만 한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려면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뜻이 죽고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은총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총을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내 뜻이 그분의 뜻을 넘지 못하게 해야 은총이 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영성의 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상]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연중 제6주일 (2020.2.16.) (0) | 2020.02.16 |
---|---|
[묵상]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연중 제5주간 토요일 (2020.2.15.) (0) | 2020.02.15 |
[묵상]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연중 제5주간 목요일 (2020.2.13.) (0) | 2020.02.13 |
[묵상]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 연중 제5주간 수요일 (2020.2.12.) (0) | 2020.02.12 |
[묵상]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세계 병자의 날) (2020.2.11.) (0) | 2020.02.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