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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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에 이상이 있으면 엑스레이(X-ray)나 엠 아르 아이(MRI), 또는 시티(CT) 촬영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들은 바로는 촬영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촬영된 사진을 잘 판독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실력이 좋은 의사는 그 사진을 제대로 판독하지만, 그렇지 않은 의사는 사진을 보고도 올바른 진단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똑같은 현실 앞에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방황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그 현실에 충분히 만족하며 행복할 줄 압니다. 곧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적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를 데리고 벳사이다에서 떨어진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왜 외딴곳으로 가셔야만 하였을까요? 벳사이다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고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1,21 참조).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가득한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어 주십니다.
여느 때처럼 사람의 가장 약한 곳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런데 당장 낫지는 않았습니다. 눈먼 이에게 사람이 보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식물처럼 보였습니다. 아직 사람을 볼 만한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욱더 특별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곧 눈을 뜨게 해 주시려고, 두 눈에 손을 얹어 눈을 가리십니다. 빛을 주시려고,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워 주십니다.
참세상을 보려면 어둠 속의 시간이 필요합니다.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으시어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나와, 당신의 거룩한 곳으로 데리고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가리신 다음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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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이 나의 시력을 결정한다>
복음: 마르코 8,22-2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을 때 라이언 긱스라는 전설적인 공격수가 있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박지성 선수도 한국 대표팀에 한 명만 데려오라면 누구를 데려오고 싶으냐는 질문에 라이언 긱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긱스는 월드컵에서 뛰는 것을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조국 웨일스가 월드컵 예선을 단 한 번도 통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아무리 혼자 잘해도 나머지 10명의 평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오는 복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해주시는 사건과 장소의 이동이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눈의 치유와 소경이 머무는 장소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바로 볼 수 있고, 또 시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선택하여 속한 가톨릭교회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그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곧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람을 나무로 볼 수 없다면 성탄트리를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경의 첫 번째 눈을 띄워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한데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는 행위나 그에게 안수하시는 행위가 다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자 그는 눈이 밝아져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 이 생명나무를 성탄트리로 장식하며 우리가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졌음을 입증합니다. 예로부터 성탄트리 맨 위에 별을 달아 다윗의 별인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불을 밝혀 빛으로 오신 예수님임을 보여주었으며, 둥그런 밀떡을 달아 이 나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죄의 동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공동체에 속하던 그 속한 사람은 그 공동체의 시력을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개신교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성탄트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성체와 성혈로 볼 수 있을까요? 그 공동체는 성체 성혈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가졌던 믿음의 눈을 다시 잃게 됩니다. 그 영적인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는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수령이 2,3천년쯤 되며, 높이가 100m를 넘고 둘레도 8-9m나 되는 큰 참나무 숲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 덩치 큰 나무들이 깊이 뿌리를 박고 그 뿌리로 다른 나무들과 서로서로를 연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란 이와 같습니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각자의 믿음이 있습니다. 혼자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그 공동체를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머물면 그 공동체의 평균 정도는 자랄 수 있습니다.
한 오케스트라에 속해있으며 혼자 다른 곡을 연주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면 다른 믿음엔 다다를 수 없습니다. 각 공동체가 제공하는 시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벗어난다는 뜻과 같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 내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결국 나의 영적인 시력을 결정함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눈의 치유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함께 이끄셨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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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르 8,22-26)
벳사이다의 눈먼 이의 치유는 마르코 7장의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치유와 연결된 이야기입니다. 일단 몸의 장애를 겪던 이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 같은 구조이고 두 경우 모두 침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같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의료적 수준이 그러했으니 침을 더러 치료용으로 사용하기도 한 모양입니다. 우리도 된장을 소독용으로 쓴 경우도 있으니 같은 맥락이죠.
그렇다하더라도 침을 쓴다는 것은 그를 모독 모욕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장애를 겪는 것만도 그는 불우하고 서러운데 예수님마저 침을 뱉지는 않으셨지만 그에게 사용한다? 여기서 인격과 상태를 분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장애를 끌어안고 사는 그의 인격을 모독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마비되어 있는 묶여있는 그의 상태를 꾸짖는 것입니다. 마비된 상태를 저주하신 것이죠. 그의 아픔이 아니라 그를 아프게 하는 그 마비시킨 그 상태는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한 상태를 침을 발라 저주하여 끊어내시고자 하는 것이죠.
7장의 귀와 혀가 마비된 상태, 8장의 눈이 마비된 상태-이는 명백히 영적으로 파탄난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고 볼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주님은 이 단절되고 갇혀진 이들을 다시 하느님께 연결하고 풀어내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시고자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치유는 마을 바깥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마을은 그의 과거의 세계, 칠흙같이 어두운 과거입니다. 다시는 돌아가지 말아야 할 곳입니다. 그래서 치유 이후에도 그에게 명하시길, 그 마을에 돌아가지 않도록 하시죠. 그곳은 회복된 이가 돌아가야할 곳이 아닙니다. 새로워진 사람은 새로운 환경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그 내면에는 과거의 살아온 체험과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나이테처럼 아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그 안에는 일곱 살 고집쟁이가 있고 사춘기의 방황도 있고 꽃다운 청춘의 설레임도 다 있습니다. 그 과거의 흔적이 나를 이루고 있고 불쑥불쑥 튀어나와 엉뚱한 행동, 현재의 나답지 않은 일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새롭게 될려고 할려면 이 영적인 요요 현상의 힘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요요의 힘이 참 심각하게 강하기에 이겨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죠. 그 마을로 돌아가면 그는 과거의 암울하고 파멸적인 삶의 영향이라는 과거로 다시 돌아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그 속에서 겪은 것들과 결별하기를 원하셨던 것이죠.
이 치유는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고치시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두 번에 걸쳐 점진적으로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희미하던 것이 두 번째 손을 얹으실 때는 확연해집니다. 세심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이기도 합니다. 그가 감당할 수 있을만큼 점차적으로 새로운 세계로 나가도록 하여야 하기 때문이죠. ‘다시’ 손을 얹어 주실 때 그렇게 됩니다.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지만 ‘다시’ 얹으시지 않으면 희미함에만 머물기도 하죠. 우리의 반응을 보시고 ‘다시’ 다가오시는 분임을 알아보고 나가는 발걸음이 되기를 청합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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