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연중 제6주일 화요일 (20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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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연중 제6주일 화요일 (2020.2.18.)

by honephil 2020. 2. 18.

[묵상]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연중 제6주일 화요일 (2020.2.18.)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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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이 구절을 그리스어 원문에 더욱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빵들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배 안에 제자들과 함께 있는 빵은 한 개뿐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면, ‘빵들’과 ‘빵 한 개’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인 빵들을 챙기지 않았는데, 어째서 배 안에 빵 한 개가 남아 있던 것일까요? 도대체 그 빵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먹는 빵이었다면 제자들이 “빵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빵이 한 개밖에 없다.’ 하고 서로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그 빵 한 개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두고 빵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분께서 바로 누룩 없는 빵 곧 파스카 음식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어 그분을 누룩 없는 빵으로 받아들이라고 일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도 ‘누룩’ 때문에 걱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걱정과 제자들의 걱정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악한 영향력이 미칠까 걱정하시지만, 제자들은 지금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걱정합니다. 같은 말 속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의 걱정이 영적인 것이라면, 다른 걱정은 육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걱정이 구원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른 걱정은 의식주와 관련된 것입니다.


과연 이 두 가지의 걱정에서 우리는 무엇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겠습니까? 육적인 것에 마음을 써서 우리 안에 계신 빵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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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의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믿음이다>  
  
복음: 마르코 8,14-2

하루에도 120번의 발작을 일으켜 모든 의사들이 수술을 포기했던 한 악성 뇌암환자의 수술을 성공시켜 ‘신의 손’이라 불리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의 벤 카슨 박사입니다. 그가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수술을 성공시킨 인물입니다.

벤 카슨은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이혼한 가정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집은 가난했고 흑인이라 백인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으며 공부는 늘 꼴찌라 친구들이 바보라고 놀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아이가 세계 의학계의 거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어느 날 한 기자가 벤 카슨에게 찾아와 “오늘의 당신을 만들어준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어머니, 쇼나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따돌림을 당할 때에도, ‘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다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은 어머니의 이 말씀을 믿고 희망과 용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머니가 왜 공부 안 하냐, 나쁜 친구들과 왜 어울리느냐, 왜 인내심이 없느냐 등의 말만 했다면 벤 카슨이 그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행동을 바꾸려 해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변화되고 믿음으로 재창조됩니다.

하느님의 백성도 믿음으로 창조된 백성이지, 행동을 변화시켜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행위는 믿음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따라 나옵니다. 믿음 없는 상태로 하는 행위는 위선이나 흉내입니다.
 
오늘 복음은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저는 빵 일곱 개를 교회의 7 성사로 보고 싶습니다. 7 성사는 분명 우리 자신의 옛 본성을 죽이고 하느님 백성으로 재창조되는 힘입니다. 그리고 7 성사의 중심은 성체성사입니다.

어쩌면 요즘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인 이 7성사를 두고도 바리사이처럼 하늘에서 오는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문에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이상의 다른 표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믿음만으로 충분히 하느님 자녀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머릿속에는 율법만 잘 지키면 하느님 백성이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로 주시려는 믿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빵은 분명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들은 “열둘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열둘은 아무래도 이스라엘 지파의 수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 당신 백성, 곧 교회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빵 다섯 개는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고 오천 명은 그 몸을 받아 모시는 이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인 성사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 백성이 되는 것이지 다른 표징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느님 자녀가 되려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예수님과 하나다!”를 믿기 위해 이 말을 반복하며 쓰거나 자주 되풀이하며 기도드렸다면, 10년, 아니 1년 뒤에 누가 더 예수님과 가까운 하느님 자녀가 되어있을까요?

예수님을 닮으려고 이러저러한 행동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진전이 없을 것입니다. 행동은 바뀌었겠지만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참다운 하느님 백성은 믿음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성체 성혈로 자신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은 1년 뒤에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없이 행동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 없이 행동만 바꾸려는 사람은 우리를 위선자가 되게 합니다. 벤 카슨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부모는 결국 믿음을 가지게 해서 자녀를 변화시키는 분들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고 하느님의 신성을 모신 성전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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