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20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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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2020.1.28.)

by honephil 2020. 1. 28.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 고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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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참가족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살아보겠다면서 많은 결심을 하고 실천할 것을 계획합니다. 물론 계획한 대로 실천하는 경우는 참 드물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결심하고 실천 계획 세우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도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겠다면서 절제와 극기, 봉사와 기도 생활을 무리하게 계획합니다. 실패로 돌아선 신앙생활의 결심들 앞에 늘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또 다른 신앙생활을 꿈꾸기도 하지요. 그러나 참된 신앙은 그저 예수님 발치에 머물고, 그분의 말씀이 무엇인지 몰라도 애써 이해하려 겸손되이 경청하는 것입니다.


제 계획에 눈멀고 귀먹어 바로 옆에 계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사실을 반성하며, 다시 한번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길을 걷겠노라 다짐하였던 신명기계 역사서의 정신은,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듣는 귀를 가지는 것이 변화와 회개의 시작입니다.

 

듣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결심하고 계획하는 일은, 알지도 못하는 길을 무작정 나서는 무지한 사람들의 반복된 죄악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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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8일 화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마르 3, 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5)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대한 신학자 이시면서 동시에 철학자이셨던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저와 함께 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당신께서 저의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십사고 청하는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다. 항상 생각은 하지만 잊고 사는 당신께서 저의 삶의 주인이 되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시간들을 조금씩 늘려가고자 노력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참으로 싶지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넘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엄청난 도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성으로는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여기지만 실제 삶의 세계 안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 불가능을 현실화시키는 그 능력이 하느님께로부터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오늘 말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하고 계실 때 당신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찾아온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십니다. 

참으로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당신의 가족관계를 부정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좀 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 주위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당신께서는 어떠한 특정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고 통치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장소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장소라면 어느 곳이든 그곳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함께하고 계시는 이 땅에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결혼하는 일도 없고 형제자매의 육적인 관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당신의  주변에서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이 사람들이 바로 당신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적인 관계의 가족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에 우선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랑은 대립적인 관계의 사랑이 아닌 차원이 다른 사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이나 세상적인 것들을 두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함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곁들여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실천이 혈연적인 배타적인  형제의 틀에 매여 있는 우리를 하느님 안에서의 열린 형제적인 개념 에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코린토 후서 5장 17절의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하는 말씀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하루 되시도록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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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1-35)

올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습니다. 눈 구경도 어렵습니다. 피정 집은 추워야 제맛인데^^ 원체 날이 좋다 보니 로비에 있는 난로가에도 덜 모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침묵 중임에도 난로가에 신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온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덜합니다. 통나무를 난로에 넣고 불티가 튀는 소리를 듣는 것도 나름 쏠쏠한 재미인데 재미 하나가 줄었습니다. 심지어 기도하다가 열 받았는지 반바지 입고 돌아다니는 ‘뜨거워진 젊은이’도 나오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무서운 바이러스와 전쟁 중인데 이곳은 무풍지대, 저는 저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스러운데 우리 신학생들의 용맹정진은 바이러스 따위를 다 몰아낼 기세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 누이, 어머니 새로운 내 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에 지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지금 내 가족은 누구인가? 어릴 적 그렇게도 싸웠던 쌍둥이 형, 이제는 이따금 만나는 사이고 삶의 자리가 너무 달라졌기에 좀 서먹할 때가 많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부쩍 기력이 쇄 해 진 아버지,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지만 그렇다고 곁에 붙어 돌볼 수 없는 처지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변명과 체념이 들 밖에요. 교회 밥 먹은 지 꽤나 되었으니 결국 교회 안에서 삶을 나누는 이들이 새로운 내 가족이라도 해도 무방하긴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단 이야기죠. 이렇게 시간을 같이하고 이렇게 같은 지향을 가지고 있으면 가족이라고 할만하긴 합니다. 그런데 막상 이론과 실제가 가진 너무도 현격한 차이와 간극! 사제로 살면서 내 신자이고 내 사목 대상이고 때로는 내 고민거리였을 지언정 내 피붙이로 여겼던가 되묻습니다. 그리고 반성합니다. 가족이라기엔 참 꼴 보기 싫다고 여긴 적도 있었음을.

농담처럼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본당에서 속 끓이게 만든 주일학교 어떤 녀석에게 쏘다 붙였었죠. ‘아무개야, 너 왜 성당 꼬박꼬박 나와서 날 괴롭히니. 그런 것 싫어서 혼자 사는 사람한테. 차라리 이럴 거면 요 앞에 한우리 교회 가서 목사님 괴롭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 자식 버리는 비정한 부모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가 내 누이라면 내 형제라면 내 부모라면 적어도 그렇게 대하면 안 되었습니다. 아무리 싫어도 아무리 짜증 나게 해도 도대체 이 사람들이 내게 이리 심하게 막 대하나 싶을 때라도 그가 내 가족이라면 그래도 참아주는 것이 먼저였을 텐데 말이죠. 예수님께서 당신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핏대를 올린 이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아들었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한 달 피정 함께하는 이 신학생들부터 내 가족으로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습니다. 기도 시간에 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밥 먹고 기도만 하는데 그게 뭐 그렇게 어렵냐고 닦달했습니다. 앞으로 너 같은 놈이 교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혼찌검을 내기도 했죠. 차라리 얼른 갈길을 정하라고 비난 섞인 냉정한 판단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죠. 그러나 내 동생이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엉뚱한 기도를 하고 태연히 이야기하더라도 내 동생이라면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여야 하겠다고. 이 귀중한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는 것 같아 훈계하기 이전에 먼저 같이 이 길을 열심히 걸어가 보자고 격려하자고. 아직 젊어서 하느님 만난다는 것이 힘든 것은 당연하다고. 이만큼 살아보니 여러분만큼만 사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난 그러지 못했노라고. 내 노후대책인 여러분들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고 흐뭇하다고. 끝까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걸어가자고-그렇게 말해주어야겠습니다. 문제는 이 친구들이 별로 형이라고, 삼촌쯤 된다고 그도 아니면 가끔 보지만 그래도 속정은 느껴지는 가족 중 누구누구라고 저를 받아들여줄지가 관건이긴 합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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