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은 끝장이 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라 고도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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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만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창세 1장 참조).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것은, 실제로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다고 규정하고 판단하는 우리 인식의 편향성이 그것을 나쁜 것이라 매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누구 눈에는 좋고 또 누구 눈에는 나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우리 시선의 왜곡이 참으로 나쁜 것입니다. 제 눈에 낯설고 불편하면 악마로 규정하는 일이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신심 활동을 하는 신자들 사이에 편 가름의 잘못이 자주 목격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를 형제애로 보듬어 줄 수 있는 근력을 키워야 합니다.
교정 사목을 하면서 사형수를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왜일까요?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간다움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닐까요? 비록 누군가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늘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나시는 성령께서는 화합과 용서의 힘을 간직하도록 신앙인을 도우십니다.
서로 달라도 하나의 신앙을 지켜 나가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서로가 다른 것이 당연하듯, 서로가 하나로 일치하는 것이 성령의 세상에서는 당연합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악마입니다. 악마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서로를 품어 주어야겠습니다.
다름에 대한 적응, 이것이 참 좋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첫걸음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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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사랑을 하려고 해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을 만난다>
복음: 마르코 4,22-30
라이언 화이트는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그만 에이즈 보균자의 피를 받게 되어 13살의 나이에 에이즈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의 부주의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라이언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너무나 밝게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고 부모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전 미국으로 알려지게 되자 당시 레이건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마이클 잭슨 등의 유명인사들의 위로와 선물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라이언은 5년간의 투병 끝에 18세에 죽습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아버지와 나눈 대화 내용이 크리스천 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그러자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빠, 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빠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어요. 아빠는 저에게 천국에 가는 티켓을 주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잖아요.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어요.”
어떤 아이들은 성당 가라고 하면 성당 가서 뭐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부주의로 암이 걸려 죽어가면서도 라이언은 큰 선물을 받았다고 감사해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는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나와 보라고 하면 “종교집단은 다 돈 뜯어먹으려고 저러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니까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내어주어도 그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살과 피로 이웃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무언가를 내어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성체 성혈에서 하느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이 항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과 심지어 하느님도 이기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성체 성혈보다 큰 사랑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도 사랑을 발견해내지 못하면 그런 상태로는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없으시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절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내가 먼저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성령이 보입니다. 좋은 영은 좋은 영을 알아보고 나쁜 영은 나쁜 영을 알아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영을 보고도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안에 좋은 영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사랑의 선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보입니다.
‘예쁘게 말을 하니 좋은 사람들이 왔다.’의 저자 심희정 씨는 ‘독설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옳고 그름이 명확했고 해야 하는 말은 꼭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외로움뿐이었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녀가 20년째 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도 말을 예쁘게 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시도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웃에게 내 살과 피를 내어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해 보아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사랑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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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라 고도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마르 3,22-30)
예수님의 친척들이 주님을 붙들러 옵니다. 주님이 미쳤다는 수군거림이 널리 퍼져나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두고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예수의 구마가 일어나고 있다고 모함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두고 비정상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이 기준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는 예수는 비정상이고 미친 것이고 마귀와 한편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지혜를 비정상으로 봅니다. 고린도 후서 2,14에서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현세적 인간이 한계가 그런 어리석음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지혜로는 하느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기에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면서 고난이 오고 고통이 닥칠 때는 대부분 겸손해지며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그 위기가 지나가면 세상적 삶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과연 이것이 정상입니까? 일상적 삶에 파묻혀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고통의 상황에서 기도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을 때 어서 정상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은 그 기도의 부재 상태가 오히려 비정상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를 꼬집으면서 교회의 현재 상태를 ‘무기력한 정상상태’라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회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은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지혜를 붙드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에서 예수님은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을 대고, 오리를 함께 가자면 십리를 함께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복음은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나요 아니면 비정상적인 것으로 들리나요?
권력에 찌든 사람, 힘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복음이 미친 짓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하느님의 가치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 대신 한 마리의 양에 목숨을 거는 것이고,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저녁 하루해가 끝날 무렵부터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율법적 가치, 공로의 가치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느님의 가치는 살리는 가치입니다.
이 다른 가치 기준 때문에 예수님은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으셨습니다. 어느 가치를 품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때로는 그 모함과 수모가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스러운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는 이는 행복하다’하신 이유입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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