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연중 3주간 수요일 (2020.1.29.)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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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운명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면, 더욱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좋을 테지요. 서른 배보다는 예순 배, 예순 배보다는 백 배의 열매가 백번 나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씨앗을 우리 삶에 빗대어 보자면, 씨앗이 뿌려진 흙의 상태가 천차만별이라 열매를 얼마나 맺을지 가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일까요, 늘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오늘도 얼마간의 요행을 바라며 삶의 씨앗을 곳곳에 뿌려 보기도 합니다. 말씀을 씨앗에 빗대어 표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다양한 땅의 모습을 염두에 둔 흔적을 담아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 어찌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길과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버린 말씀의 씨앗은 온갖 역경에 내던져진 가엾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씨앗에게는 크나큰 상처일 수 있겠지요. 교회의 역사 속에 열매 맺지 못한 말씀의 씨앗도 있었지만, 말씀은 끊이지 않고 우리 신앙인의 삶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식의 경쟁적 말씀 선포와 승리주의의 우월적 선교는 진정한 말씀의 선포가 아닐 것입니다.
말씀은 길과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 뿌려졌고, 그런 말씀의 아픔들이 있었기에 어딘가에 열매를 맺는 말씀의 기쁨들이 생겨난 것이겠지요. 오늘의 아픔을 제거한 자리에 말씀이 열매 맺지 않습니다. 아픔 속에 아파하는 이들 덕택에 오늘의 신앙이 따사로운 햇살 속에 무럭무럭 자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씨앗 옆에 숨 막혀 죽어 가는 씨앗들이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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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를 알려줄 스승을 찾으려는 마음이 ‘들을 귀’다>
복음: 마르코 4,1-2
폴란드의 조그만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웬일인지 독일군이 이 마을에는 나타나지 않아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드디어 독일군이 나타났습니다. 일부는 마을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학교로 가 학생 중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유태인 어린이들을 끌어내려고 하였습니다. 독일군의 모습을 본, 가슴에 별을 단 유태인 어린이들은 무서워서 선생님에게 달려가 매달렸습니다. 코르자크란 이름을 가진 선생님은 자기 앞으로 몰려온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주었습니다.
트럭 한 대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팔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단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
독일군은 코르자크 선생님 곁에서 유태인 어린이들을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코르자크 선생님은 군인을 막아서며, “가만 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자, 우리 함께 가자. 선생님이 같이 가면 무섭지 않지?”
“네, 선생님.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라 트럭에 올랐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독일군이 선생님을 끌어내리려 하자, “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사랑하는 이 어린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오.” 하며 선생님도 아이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마침내 트레물렌카의 가스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은 유태인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죽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지식을 가르치는 스승이 있고 의미를 가르치는 스승이 있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가르친 스승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리송하게도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가 뭘까요?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느냐는 열두 사도들의 질문에 이렇게 더 아리송한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용서받지 못하게 비유로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를 통해 들을 귀가 있는지, 없는지 분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열두 사도만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여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제자들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끄십니다. 지식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교만을 죽여야 하고, 돌밭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육체와 싸워야 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비유의 해석은 다 십자가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식은 원했지만 십자가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참 스승으로부터 배울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삶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스승도 있습니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영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 스승을 만나는 것도 문제입니다. 참다운 영적 스승은 비유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발견하고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리스도로 보이고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로 보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성체로 보이고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생명의 물을 주시는 바위가 그리스도로 보였습니다(1 코린 10,1-4 참조). 탈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신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길로 이끌 스승을 찾으려는 마음이 ‘들을 귀’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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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르 4,1-20)
네 가지 땅에 대한 이 비유를 비유 중의 비유라고 합니다. 모든 비유의 절정이랍니다. 뭐 그 정도까지 일까요? 예수님이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질문받으시고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며 직접 이 비유의 비중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알지 못하고는 다른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없다!! 그래서 비유 중의 비유라 말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 읽는 순간 딱 답이 나옵니다. ‘옥토가 되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전제를 딱 내려놓고 새로운 말씀으로 들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좋은 밭 되자, 옥토 되자, 그러기 위해 땅을 갈아엎자! 이런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보지 않아야 새로운 해석이 열립니다.
생각해보면 밭은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밭 스스로 될 수 있나요. 오늘부터 밭이 결심해서 좋은 땅 되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밭은 원래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밭 자체로는 불가능 투성이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가족관계에 대한 어제 복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 내 동생들이냐?’ 대답이 뭐였나요.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가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다.’ 유다인들은 혈통 중심으로 당연히 가족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어머니 형 제냐인 줄 아느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들이고 가족들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의 연장 선에서 비유를 보아야 합니다.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을 때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많은 군중 속에는 수많은 동기를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이 다 섞여 있죠. 빵의 문제 해결, 정치적 문제를 가지고, 영적 기갈에 시달리는 사람. 그런데 이 많은 군중이 다 하느님의 가족, 당신의 백성인가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죠. 그런데 알아듣지 못해요. 다 깨닫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누구만 알아들어요. 누구에게만 알려주시나요. 열두 제자를 필두로 몇몇 사람들에게만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선택된 이들 하느님의 백성 교회만이 이것을 알아듣는단 말이죠.
그렇다면 좋은 땅 되자, 결실 맺자, 열매 풍성해지자. 이러면 이것이 복음이 되나요. 안된단 말이에요. 왜냐면 스스로 맺을 수 없기에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 힘들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땅은 아담 하와의 범죄로 저주를 받은 그 땅입니다. 창세기에 가시덤불 엉겅퀴 잡초를 내었던 그 땅이고 또 인간이 먼지에서 왔으니 다시 그 먼지로 돌아갈 그 땅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땅은 기를 써도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뭐가 떨어집니까? 씨가 떨어집니다. 뿌려집니다. 이 씨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초점은 땅이 아니라 씨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 씨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이시란 말이죠.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은 그리스도이시죠. 사람이 되신 말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는 이 절망의 땅, 도저히 열매 맺을 수 없는 이 땅에 뭐가 떨어지는 사건인가요? 예수님이 생명으로 떨어지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여기서 한 알의 밀알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강림하셨어요. 이 땅은 저주받은 땅, 사망의 땅이었어요. 그런데 그 땅에 주님께서 태초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하신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신 로고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생명의 씨로 떨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으셨어요.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거기서 삼십 배 백 배 열매를 맺은 것을 가리켜 네가 믿었다, 의롭다, 선택되었다, 좋은 땅-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도무지 생명을 키워낼 수 없는 존재였는데 가시덤불 돌밭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저 열매를 피워내시려고 이 거친 땅에 당신 말씀 아들을 씨앗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군중이 몰려왔지만 다 선택되진 않았단 말이죠.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비유와 설명 사이의 이 말씀은 그러한 사정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로부터 조건 없이 선택된 이들이고 기본적으로 원죄 이래로 범죄 한 인생은 귀 닫고 눈 닫은 그래서 구원될 수 없는 자들인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구원의 은총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설레어서 저절로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가 아니라 이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선택될 수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씨앗에 담긴 생명으로 조건 없이 뿌려졌음을 기억하는 것, 이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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