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지역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두시켰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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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둘’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유다 사회는 그 숫자를 ‘민족’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이룬 통일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 ‘열둘’이었고,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곧추세울 때 사용한 숫자가 ‘열둘’이었습니다.
곧 ‘열둘’은 참된 신앙을 지닌 하느님 백성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파견하신다고 하여서, 요즘의 ‘경쟁의식’을 염두에 둔 해석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열둘은 다른 이들과 달리 능력 있는 이들로 뭉친 특정 계급이 아니라, 모든 이가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다는 무한한 초대의 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떠한 차별도 없이 예수님 곁에 머물며, 모든 이에게 파견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열둘의 참된 의미입니다.오늘 우리 곁의 또 다른 열둘을 생각합니다.
이웃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 자신이 ‘열둘’의 범주 안에 함께하는지 되돌아봅니다.
‘열둘’이기 위하여 스스로를 가두어 놓는 일이 없는지, 나는 진정 자유로운지 되물어 봅니다.
예수님의 ‘열둘’은 너무나 다른 사상과 삶의 방식을 지닌,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들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서도 너무나 다른 생각들이 부딪치고 갈라지고 있을 테지요.
그런 나를 진정 사랑하고 또한 그런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열둘’의 자리는 무한한 우주처럼 유연하고 여유로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제자여야 해!’라는 독선은 내려놓고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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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촉’의 관계에 ‘부르심과 응답’을 넣으면 ‘연결’의 관계로 바뀐다>
복음: 마르코 3,13-1
인자한 눈빛을 지닌 한 원로 승려가 강연을 마치고 뉴욕 출신의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기자가 받아 적을 준비를 하며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강연 중에 '접촉(contact)'과 '연결(connection)'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좀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승려는 미소를 지으며 기자의 질문과 상관없는 것을 물었습니다.
“고향이 어디인가?” 기자가 뉴욕이라고 대답하자 승려가 다시 물었습니다.
“고향 집에는 누가 있는가?”
기자는 승려가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불필요한 질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대답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 혼자 계십니다. 형들과 누나는 모두 결혼했습니다.”
승려가 다시 미소 지으며 물었습니다.
“아버지와 종종 대화를 나누는가?”
기자는 눈에 띄게 불편해졌지만 승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물었습니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눈 게 언제인가?”
기자가 불쾌감을 억누르며 말했습니다.
“한 달 전쯤 됩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승려는 더 나아갔습니다.
“형들과 누나와도 자주 만나는가? 가장 최근에 온 가족이 모인 적이 언제인가?”
기자는 혼란스러워져서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무더운 날씨 탓만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인터뷰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기자가 말했습니다.
“2년 전 크리스마스 때 모였었습니다.”
“그때 며칠 동안이나 함께 있었는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기자가 말했습니다.
“2,3일 정도…”
승려의 질문이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기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수첩에 무엇인가 적는 시늉을 했습니다.
“아버지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가? 나란히 같이 앉아서 함께 아침, 점심, 저녁을 먹은 적이 언제인가? 아버지의 기분이 어떤지 물어본 적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자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승려가 기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내 질문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이것이 그대가 질문한 ‘접촉’과 ‘연결’에 대한 답이라네. 그대는 아버지와 ‘접촉’ 해 왔으나 ‘연결’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네. 연결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정신적 교감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함께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서로를 보살피는 것이지.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그대의 형제자매도 서로 접촉하고 있지만 연결은 사라져 가고 있는 듯하네.”
기자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습니다.
“잊지 못할 중요한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는 ‘연결’을 자랑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초고속 인터넷 망의 발달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결되어 있다고 믿을 뿐 접촉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혹은 휴대폰으로 쉼 없이 문자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접촉을 연결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오래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문화 속에서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 조차도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어느 블로그에서 인용한 것을 카톡으로 받은 내용입니다. 인간관계는 우리 모두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람의 가장 큰 고민거리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지만 진정한 친구는 하나도 없다고 느끼며 외로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는 접촉은 하지만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수많은 접촉의 관계가 깊은 연결의 관계로 바뀔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께 나아오자 그 열둘에게 ‘사도’라는 직책을 주십니다. 사도들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받습니다. 이 소명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하시던 소명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열두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닐 때는 거의 접촉의 단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서로 같이 먹고 자며 살아가지만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불러주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면 사도들의 관계는 이제 연결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에 단순한 접촉의 관계가 생명을 내어줄 수 있는 연결의 관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 중에 가리옷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는 나머지 열한 사도와 연결 관계에 있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접촉만 유지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믿지 못했고 그분이 주시는 소명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지만 관계의 주인도 되십니다. 깊고 연결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명확한 부르심을 믿어야하고 나도 확실하게 그 소명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제 설 명절입니다. 이번 설에도 오랜만에 가족끼리 접촉할 것입니다. 그냥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면 그냥 허무한 접촉의 시간으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우리 가족 안에 주님을 모십시다. 주님께서 모이게 해 주셨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시간이라고 믿읍시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서로 각자의 위치로 돌아올 때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접촉이 연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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