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하여도 “조용히 하여라.” 하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는 왠지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살갑게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르코 복음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거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사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어 세상에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영광과 기쁨 가득한 자리를 꿈꾸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며 건강한 몸과 현실적 축복을 갈망하였던 군중은 십자가와 하느님의 아드님을 도무지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군중과의 ‘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내던지는 우리 욕망의 투사만큼 깊고 먼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지향점은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영광과 맞닿아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모든 이와 함께 사랑을 이루는 데 쓰여야 합니다(1 코린 1―2장; 13장 참조). 제 이익과 신념만을 위한 기도라면,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침묵하기를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십자가는커녕 제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도구로 삼는다면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기 전에 침묵을 배웠으면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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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에게 피 빨리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복음: 마르코 3,7-1
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어딘가 좀 이상합니다. 양쪽 눈의 색깔이 다릅니다. 한쪽 눈은 푸른색입니다. 자라면서 매우 폭력적이 됩니다. 마음에 안 들면 친구들을 심하게 때립니다. 잘 때 잠꼬대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합니다. 엄마는 그 잠꼬대를 녹음하여 전문가에게 의뢰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난 날과 그 시간에 다른 나라에서 연쇄 살인마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살인마의 눈 색이 푸른색 임도 알게 됩니다. 그 살인마의 영혼이 그 아기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아이는 아버지까지 거의 죽을 지경이 되게 만들어놓고 그때 죽이지 못한 한 여자를 찾아갑니다. 어머니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자신이 먼저 그 여자를 죽이면 자기 아이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아이는 완전히 그 살인마에게 사로잡혀 있었고 자신에게 이용당한 어머니까지 살해하고는 다른 집으로 입양됩니다. 영화 ‘프로디지’(2019)의 내용입니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영화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답답한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의 영혼이 살인마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식이라는 연민 때문에 자식이 원하는 살인을 대신 해주려고 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는 이런 경우가 없을까요? 자녀가 못된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자녀의 애정을 잃지 않기 위해 휘둘린 적은 없나요?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씩 애정에 휘둘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끊어야 할 때는 끊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과 자녀를 위해 좋은 일입니다.
유튜브 채널 ‘강형욱의 보듬 TV; 내 강아지의 공격성’에서 주인까지 무는 진돗개가 나옵니다. 마음씨 착한 노부부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진돗개를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그런데 쓰다듬어 주다가 물리고 마사지 해 주다가 물립니다. 상처투성이인데도 여전히 자신의 개에 대해 무척 큰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고 말하는 개 전문가인 강형욱 씨는 노부부에게 개 다루는 법을 시범으로 보여줍니다. 개가 자신에게 허락도 없이 발을 감싸자 짧은 목줄을 강하게 당겨하는 행위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 주위를 돌며 자신의 영역에 강형욱 씨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 하자 역시 목줄을 당겨 돌지 못하게 만듭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개인지 명확히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무섭던 개가 발에 땀까지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러며 노부부에게 개를 사랑하는 것은 알지만 개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간식을 주고 개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대었을 때 물린 이유는 개에게 애정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뽀뽀를 하려고 하다가 물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형욱 씨는 먼저 쓰다듬게 해 주면 간식을 주라고 합니다. 개가 지켜야 할 선을 인간이 무너뜨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여 그들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십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 밀치거나 잡아당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군중 가운데는 마귀 들린 사람들도 있어서 예수님께 어떠한 해를 끼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휘둘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자께서 완전히 사랑하는 사이 시라도 그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거리를 이어 줄 성령께서 필요하신 것입니다. 무조건 거리를 좁혀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직 모기의 수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기와 기생충이 생명체이기는 하나 그것들에게 무작정 피를 빨려주는 것이 곧 자비는 아닐 것입니다. 그 피의 의미를 깨닫고 변화될 수 있는 이들에게만 피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나쁜 사람처럼 보는 것도 문제지만 모두 천사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나를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작은 지혜가 쓸데없이 소비될 수 있는 에너지를 아끼게 만들어 더 많은 이들에게 더 큰 사랑을 하도록 이끕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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