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연중 제2주간 월요일 (20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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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연중 제2주간 월요일 (2020.1.20.)

by honephil 2020. 1. 20.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유다 사회는 단식을, 기도, 자선과 더불어 하느님을 만나는 일상의 당연한 도리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당위에 대한 도전이자 저항으로 비쳤을 테고, 예수님의 공동체는 기존 사회에 이질적인 무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신랑과는 기쁨을 나누어야 하고, 기쁨 속에 단식할 수 없다! 이러한 예수님의 논리는 우리의 일상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야 하지만, 기쁘게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기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기쁨은 신랑과 함께하는 기쁨이지 저 혼자만의 만족감에 따른 결과물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안정적으로 보관되어 기쁨을 주는 것이지, 포도주나 가죽 부대 자체가 기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갈수록 개인 주의화되는 우리 시대에 개인적 수련을 통한 행복이나 기쁨의 수여 여부로 신앙을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속이 불편하고 어지러울 때가 많은 것이 신앙입니다. 낯선 것이 내 마음속에 포탄처럼 터져 속앓이를 할 경우가 많은 것이 신앙입니다. 일상 속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것들에 저당 잡혀 새롭게 시작한 세상의 흐름을 읽어 내지 못하고, 익숙한 것이 좋다며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신앙에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신랑을 얻어 새로운 집에 머물 기쁨을 잊은 채, 혼인 전 제집을 고집하는 신부는 없을 테지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은 개인적 수련이 아닌 사회적 수련을 통하여 공동체의 내일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서로 함께 머무는 자리는 꽤나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 포도주를 마셔야 하고, 새 포도주를 마시려면 우리의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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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술을 새 부대에 담는 삶.(마르 2, 18-22)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 19-20)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습니다. 내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특히 사회의 지도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삶의 의무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새 사람이 필요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메시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구 시대의 사고의 틀을 깨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아무리 틀이 새롭게 보여도 내용이 바뀌지 않으면 새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동시에 그 반대도 성립이 될 것입니다. 땅을 바라보고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늘을 바라볼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새 술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깨어서 기도하는 삶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보지 못하고 겉만 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수가 한 사람을 두고서 공격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진리를 추구하고 옳은 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불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수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옳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자신의 주장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의무적인 단식을 했습니다(레위 16,29), 그리고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재난을 겪을 때 슬픔과 고난의 표현으로 단식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일주일에 고행으로서가  아니라 신심 행위로써의 두 번 단식을 했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사이들과 비슷하게 단식했는데, 아마도 스승의 엄격한 극기와 고행을 본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형식적인 단식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마태 6,16-18).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을 드러내는 기도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드러내는 그 기도가 자신의 삶과 유리된 기도일 때 그 기도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기도가 될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바리사이로 몰고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 기도는 하느님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게 합니다.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은 바로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반대를 해도 혼인잔치에서 단식을하지 않는 용기를 지닐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 22)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새로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틀 안에서 안주할려고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틀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낡고 헐어서 새포도주의 왕성한 발효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사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없고 겉만 번지르한 삶에서 빨리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결여된 판단의 도구가 되어버린 율법이 아닌 이제는 포용과 겸손과 나눔의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이 만든 틀이 너무나 뿌리 깊고 견고하기 때문에 이 틀을 깨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룩 예언자의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바룩 4:28}는 그 말씀이 메아리 쳐 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 지혜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을 떠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 빠져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세상에서 한 걸음 벗어나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빠져서 허둥대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지금이 그 순간입니다.

악의 유혹에 빠지기는 쉬운데 그 악의 유혹에 빠진 내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 배 백 배의 노력이 필요하답니다. 하지만 그러한 유혹에서의 빠져나 옴은 내가 노력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유혹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자신이 바로 헌 부대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새 포도주인 예수님을 우리에게 담아야 합니다. 새 부대의 주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의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언제나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 땅에 하늘나라가 완성되도록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하루 되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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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말씀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18-22)

제일 맛있는 고기는 금요일날 금육재를 어기고 먹는 고기랍니다. 제일 즐거운 여행은 주일을 어기고 떠나는 여행이랍니다.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지요. 단식은 자기 절제의 수단입니다. 종교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먹는가는 생각보다 더 중요합니다. 죄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서 필요하고 유효한 수단으로 단식을 권고하고 보속 목록에 포함되어 있던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가에 대한 창세기의 이야기는 그 점을 알려줍니다. 첫 사람들이 잘못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그만 먹어버린 것입니다. 유혹이 어떻게 극복되었는가에 관한 복음의 이야기도 그 점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의 40일 엄재를 지내셨습니다. 광야에서의 첫 번째 유혹은 빵의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단식하면서 기도하셔서 허기를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안 드셨다는 것이지요. 먹는 것은 죄에 넘어가는 것이고 안 먹는 것은 유혹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에 대한 승리로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단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이 왜 무너집니까? 어제까지 승승장구하던 그 정치인이 왜 몰락합니까?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안 먹는가의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누릴 수 있지만 누리지 않는 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기에 은혜로운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과 은혜를 생각할 때 흔히 우리는 무엇인가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합니다. 좋은 직장, 긍정적인 평가, 노력 이상의 성과! 그것이 은혜라고 여깁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뭔가 내 청과 내 원함과 내 소망이 성취되는 것만이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그 청은 들어주셨는데 삶은 피폐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청함이 성취되어 우리 삶이 충만해진다면 그것은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함은 응답되었지만 그 결과로 삶이 오히려 피폐해진다면 그것은 나의 청함이 정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도가 옳지 않았는데 나의 강요로 주님이 굴복하실 때 그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 됩니다.

그러니 어쩌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해야 합니다. 모두가 인정해준다면, 지나치게 존경받고 칭송을 듣는다면, 모든 결과가 다 흡족하다면 그것은 이미 다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노력한 만큼 대가가 회수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게 됩니다.


우리의 단식은 단지 자신의 열심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바로 이 시간 안에서, 이 땅에서 지금 모든 것을 다 누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여기가 다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 말입니다.


하느님께 받을 것을 남겨 두겠다는 것입니다. 받을 상을 다 받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식하고 희생하고 절제합니다. 바리사이의 단식과 그리스도인의 단식은 그렇게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는 이 땅에서 다 누리지 않겠다-그런 정신이 새롭습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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