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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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20.1.21.)

by honephil 2020. 1. 21.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 사회가 아무리 발전한다 하여도, 인간의 본성과 기본 욕구를 가로막고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와 법규들은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가장 인간답게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이라 밥을 먹을 권리가 없다는 둥, 모자란 사람이라 좋은 것을 누릴 이유가 없다는 둥, 제 기준으로 세상을 마구 단죄하고 규정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천박해지고 비인간적인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챙겨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인간이 지음받았을 때의 본성이자 욕구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본디 안식일은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명 5장 참조).  무엇보다 서로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경제적 처지가 다름을 기억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각자가 저마다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규정하고 줄 세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창세 11장 참조).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은,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지 않은 채, 제 기준을 절대화하는 완고함에서 비롯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서로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 그 인간은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지만 서로 하나가 되어 살아갑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나 둘로만 규정해 버리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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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이 존재하는 이유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 27 -28)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하느님의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존재하게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감사는 우리의 삶을 활기있게 해 줍니다. 일상의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감사는 지금의 힘듬과 고통의 삶을 희망 안에서 축복의 근거로 바꾸어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보는 인내와 여유의 덕을 강조하십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의 박해와 오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볼 때 규정과 법칙을 따지는 것보다 먼저 이들의 힘든 상황을 챙겨주는 마음이 중요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율법 중시 사상은 자신들 마저도 율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모릅니다.

죄를 알면서 짓는 사람도 있고 모르면서 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것의 무서움입니다. 처음에는 죄의식을 갖게 되지만 그것이 자주 반복되다 보면, 죄의식이 사라져 버립니다. 어쩌면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 역시 처음에는 본질을 보았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들의 마음속에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사랑의 본질은 사라지고 단죄의 형식이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이웃이 보이지 않고 자신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업적이 됩니다. 이 업적은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자기 과시와 남을 단죄하는 큰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신체장애자인 서강대 영문과의 장영희 교수님께서 쓰신 <내 생애 단 한번>이라는 책에서 그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질시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용서가 더욱 귀중하고, 죽음이 있어서 생명이 너무나 소중하고, 실연의 고통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더욱 귀중하고, 눈물이 있기 때문에 웃는 얼굴이 더욱 눈부시지 않은가. 그리고 하루하루 극적이고 버거운 삶이 있기 때문에 평화가 값지고,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운 말이 그 반대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질시의 아픔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한 나는 상대를 더욱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엄한 시어머니를 경험했던 며느리가 더욱 엄한 시어머니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이 보이지 않고 자신 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삶의 성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인 당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시랍니다.  안식일에 대한 모든 권한이 당신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규정을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일의 존재의 이유인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이고 인간이 우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제도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이러한 제도나 규범이 오히려 인간을 도구화시킨다면 그 제도는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에게 이제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 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내가 아닌 우리가 주인입니다. 제도 그 자체보다 인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안식일의 존재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함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모든 창조물은 인간의 관리하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인간이 죄를 범한 뒤에 하느님의 위치에 인간이 들어와 있고 인간의 위치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주와 종이 뒤바뀐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사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필요한 것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을 서로 비교하게 합니다. 비교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소유에 욕심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필요한 만큼’의 개념이 사라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필요한 만큼 소유하고 활용하는 사람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와 ‘주와 종’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참 제물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나는 어떠한 사랑을 실천할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대하실까를 생각하면서 그분을 대하고자 다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일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만사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느꼈으면 합니다. 그러한 실천이 우리의 삶을 생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 가에 대한  이 질문의 답을  멀리서 찾지 않고 일상의 가장 작은 것에서  찾으며 이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하루를 지내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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