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일치 주간) (20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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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일치 주간) (2020.1.18.)

by honephil 2020. 1. 18.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부르고 응답하는 곳에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은 관계의 예술입니다. 각자의 신분과 계급, 능력과 의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신앙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앙은 ‘우연’ 속에서 ‘필연’을 만들어 가는 고된 작업입니다. 뜻하지 않은 기회에 누군가 나의 뜻과 다른 무엇을 제안할 때, 제 의지와 능력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황망함이 가득할 때, 신앙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레위가 그런 신앙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제 삶의 자리를 박차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신앙은 앞뒤 계산하지 않는 무모한 결단에서 시작합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전적인 의탁이고, 그 의탁은 제 삶의 일정 부분을 내어놓고 또 다른 새것으로 제 삶을 꾸며 가는 상업적 거래가 아닌, 자신과 자기 자신의 결단에 대한 완전한 신뢰이기도 합니다. 의사에 빗대어 보면, 신앙의 전적인 의탁이 삶을 완성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픈 이가 의사에게 제 생명을 완전히 맡기는 것은, 그가 자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찾고 온전히 자신을 그분께 의탁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신앙 안에 하나가 되십니다.


신앙은 관계의 예술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예술 작품의 작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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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마르 2, 13-17 )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특히 남을 도울 때 도움받는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配慮(배려)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이리저리 마음을 써준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훼손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도아 주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말만큼 쉽지 않습니다. 나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순교자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어려운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배려하는 삶 역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를 이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오늘 아침에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 사랑은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임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는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세관원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 여기서 레위는 마태오복음에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라는 세관원을 그리고 루카 복음 5장 27절에서는 세리 레위라고 합니다. 이들이 동일 인물이고 열 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동일 인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시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째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집에 가서 식사까지 하십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사는 일종의 거룩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함께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함께 식사를 하는 이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환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도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비판하고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은 죄인이 아니신 분이시지만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라면 당신 스스로 죄인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분이십니다. 당신께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부터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지 않으셨던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생각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고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가 환자임을 아는 사람은 당연히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의사를 찾아갈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중병을 앓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 많은 병원비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중한 병에 걸려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레위는 자신이 참으로 큰 죄를 짓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기에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라나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적인 것 때문에 만사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너 자신이 죄인 임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라.”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찾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세상에 숨겨진 하느님이 나와 동행하는 하느님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하시지만 그분의 초대는 항상 부담이 따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항상 하느님의 초대에 열려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필요할 때만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매 순간순간을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하루 되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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