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연중 제2주일 (2020.1.19.)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연중 제2주일 (2020.1.19.)

by honephil 2020. 1. 18.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증언을 한다는 것은, 증언할 대상에 대한 탐구나 분석이 아닙니다. 증언은 제 삶의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린양”은 그런 외침을 드러내는 대표적 표상입니다.


유다 사회가 간직한 “어린양”의 의미는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대속이었습니다(탈출 12장; 이사 53장 참조).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유다 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버거울 만큼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절망은 하느님을 통하여 희망을 꿈꾸는 것으로 바뀌고, “어린양”은 미래에 펼쳐질 희망찬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려, 오시는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규정합니다. 당시 사회는 세상을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세상 한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직접 주관하신다는 희망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죄악은 세상을 단절시키고 갈라놓고 찢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 오셨고(요한 13,1 이하), 당신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서로 사랑하는 친교의 자리입니다. 증언을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사유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어린양”의 표상을 통하여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화합과 신뢰, 사랑임을 일깨웁니다. 화합과 신뢰, 사랑은 요한 복음이 쓰인 그 시대를 살아간 신앙 공동체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무엇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자신의 삶의 이유를 아는 삶(요한 1, 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살아야 되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산다고 합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있던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적이나 이유를 알고 있는데 우리의 삶이 변화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변에 많은 분들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투신함을 목격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는 표현은 조금은 과한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삶을 투신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투신이 바로 제물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자신의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전 삶을 투신하는 부모님들을 수 없이 발견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의 투신은 다릅니다. 수단도 방법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제물이 되기 위한 조건인 것입니다.

 

오늘 저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셔야 했고 그 인간이 수난의 길을 가야 했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는 양의 모습입니다. 그 양에게는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조건인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예수님께 내려 오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요한이 증언하는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 32)의 말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내려와서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그냥 내려왔다고도 할 수가 있을 텐데 ‘머물렀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바로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신 분, 즉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비둘기’는  당시에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 또 영혼을 가진 새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둘기가 내려오는 모습이 성령께서 내려오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비둘기 자체가 성령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비둘기의 내려옴이 성령의 내려옴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31절과 33절에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31절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은 서로 친척간인데 개인적으로 서로 알고 있었슴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그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차이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너무나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요한의 삶의 이유와 목적은 바로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가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자신의 임무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33절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알려주셔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그의 증언과 증언의 내용이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나탸냅니다. 그래서 앞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이 직접 눈으로 에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고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즉 메시아 이시라고 자신이 증언하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림을 받고 그 초대에 응하는 순간 우리는 계시를 통해서 알려진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믿게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만이 하느니의 계시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내가 살아야 하는 정확한 이유를 잘 알고  하느님의 뜻을 좀 더 잘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열린 마음을 갖도록 주님께 청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내 자신을 제물로 내어 놓는 거룩한 한 주간 살아가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두 분이 나이는 서로 비슷하지만 종교 지도자로서의 당시의 위상을 비교해보자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예수님은 감히 세례자 요한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마태 3,5)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심지어 이렇게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든 군중 가운데에는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마태 3,7)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추앙받았던 세례자 요한의 카리스마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못된 헤로데 임금조차도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서도 함부로 대하기는커녕 그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보호해주었다고 합니다.(마르 6,20 참조)

반면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그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요. 평범한 이웃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딱히 물려받은 것도, 성취한 것도 없는 흙수저 예수님.

 

이제 요한은 이 평범한 청년 예수를 보자, 이 분이야말로 그가 기다려왔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 보자면 자신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게 이치에 맞을 법한 이 보잘것없는 청년에게 자신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이 상황이 마냥 속이 편하지만은 않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회개와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선포하는 일이라면 요한 자신만한 전문가가 없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검증되지 않은 풋내기 청년 예수에게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모두 넘겨주어야 한다니요. 이건 꽤 불합리하지 않은가요?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업적과 능력을 근거로 자신의 몫을 주장하기보다는 예수님 위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움직임에 순종하였습니다.

일견 불합리하고 부당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추호의 의심이나 지체함 없이 기쁘게 받아들였던 요한은, 그렇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태 3,3) 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우리 하느님이 당신의 뜻을 펼치시는 방식은 워낙 다양하고 심원하여, 때로 우리 눈에 불합리하고 부당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한한 우리의 사고에 무한하신 하느님을 욱여넣고 구속하고자 하는 우리의 자만심이,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점차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에 기쁘게 순종하는 덕을 기도 중에 청하기로 합시다.

최규하 다니엘 신부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