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20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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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2020.1.17.)

by honephil 2020. 1. 17.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 미루어 놓고, 자기들끼리 단죄하기 바빴던 바리사이의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 사회의 갈등을 반성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 국가들 가운데 사회 통합 지수가 늘 꼴찌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서로 포용하고 화해하고 보듬는 데 너무 인색한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예수님과 중풍 병자라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묵상은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데리고 와서 지붕까지 뚫고 예수님과 만나게 한 네 사람에게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이름도 출신도 사상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죄인으로 낙인찍힌 중풍 병자와 함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이를 치유의 사건으로 명확히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이 땅 위의 반목과 대립, 그리고 단죄와 갈등의 한가운데서 보여 주셨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난 용서 못 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 사람은 안 볼 거야.”와 같은 말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죄와 그 때문에 생긴 상처에 짓물러 터진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신앙인은 이를 이겨 내는 내적 힘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무작정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허덕이는 우리네 삶에 다른 이의 도움이 함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인내는 형제애 안에서 더욱 견고해집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위대한 영웅의 초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혼자 아픔을 감당하는 것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 안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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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남과 돌아감의 의미(마르 2,1-12)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 11)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가끔 자신은 완벽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힘들게 세상을 살고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유한한 인간인 우리가 한계를 갖고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완전자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완전자의 능력을 우리에게로 초대하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자신의 믿음을  말로서 떠벌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비록 말로서 표현하지는 않아도 삶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으로 하느님을 선포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의 선포가 삶과 병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게 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신앙이란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매 창조의 순간마다 ‘보시니 좋았다.’는 감탄사를 연이어서 반복하십니다. 그만큼 당신의 창조의 사업은 일반적인 일의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곤함이 없는 일이 바로 창조사업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일이 아닌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입니다. 

복음서에는 누구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황으로 봐서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머무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집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 집을 찾아옵니다.  이들 중 몇 사람은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뚫어서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내려보냅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중풍병자는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신앙이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환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죄인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죄를 용서받았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면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이미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면에는 당신이 바로 이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음을 뒤에 나오는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 10-11) 하시는 말씀으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껴 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믿음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환자의 믿음 역시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들것에 실려서 올 때 자신이 싫으면 안 올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이웃의 사랑과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한 사람의 병을 고쳐줍니다. 그래서 주변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변의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도 변하고 이웃도 변하고 예수님도 변화시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신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중풍병자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의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의 모든 아픔을 털고 일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하시는 명령으로 들려옵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는 말씀을 간직합니다. 과거를 떨치고 혼돈과 어둠을 떨치고 새로운 질서와 미래로 향한 과감한 일어남을 말합니다. 이제 축복을 기대하는 삶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거룩한 하루 지내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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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 2,3-5)

가을 하늘을 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보면 대개 삼각형 모양입니다. 조류 학자들에 따르면, 혼자서 날아가는 것보다 삼각형으로 함께 날면 공기 저항을 덜 받는다고 합니다. 삼각 형태의 맨 앞에 나는 새는 공기 저항 때문에 쉽게 지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새가 앞으로 나섭니다. 그리고 기러기들은 날아갈 때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는데, 이것은 서로 격려하는 것이며 특히 맨 앞에서 공기 저항을 가장 많이 받는 새에게 힘을 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낙오된 새가 있으면 반드시 동료 새 두 마리가 같이 땅에 내려와서 도와주고 기운이 회복되면 다시 대열에 합류합니다. 이렇게 기러기는 협동심이 강하고 우애가 매우 돈독한 새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집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문 앞을 지나 예수님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관계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다른 사람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할 때 조금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주위에서 받는 작은 도움에 큰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는 작은 도움은 그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기러기들이 하늘을 날아갈 때 서로 격려하고 어려울 때에 함께하듯이, 우리도 서로서로 격려와 용기를 주고받으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우애 있게 사는 우리 모습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실 것이며, 우리에게는 사람으로 사는 보람입니다.

전숭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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