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2020.1.8.)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5-52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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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요한 1서 4,11-18
마르코 6,45-52
<인생은 타이밍입니다. 소중한 타이밍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에 이어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으시는 기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놀라운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호수 위를 걸으셨다는 보도는 예수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들 통해 군중과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명료하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해산시키신 후, 제자들만 따로 있는 장소,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그 계시를 더욱 심화시키십니다.
독자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맞바람에 죽을 지경인 제자들을 보시고 새벽녘 호수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 곁은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교부 가르침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절망할 위기에 내몰린 제자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려 하신다. 이는 제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외치는 일에 더 익숙하게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러 오시게끔 비명을 내뱉을 힘을 주시고자 그들 곁을 지나치려 하신 것입니다.”
머리 털나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기상천외한 일,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겁에 질려 혼비백산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비명을 지릅니다.
“유령이다!”
엄청 웃기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스승이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라고 하니...
곧이어 제자들은 낯익은 스승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복음 6장 50절)
스승님의 그 음성에 제자들이 얼마나 부끄러워했을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현현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의 부여자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물결을 당신 발 아래 두십니다.
그분의 옥좌는 광란하는 파도보다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거센 역풍을 다스리실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습니다.”(마르코 복음 6장 51절)
당신의 현존으로 인해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갈릴래아 호수 위의 경이로운 사건을 통해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직도 스승님의 신원과 정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특별한 일들 앞에 그저 경탄하고 있는 정도에만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스승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활짝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아직 마음이 완고해서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큰 희망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갖은 역경과 시련, 수시로 다가오는 인생의 역풍 앞에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 앞을 예수님께서는 스쳐 지나가실 것입니다.
인생은 타이밍입니다.
그 소중한 타이밍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자들처럼 유령이라고 외치지 말고,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지나쳐 가시려던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즉시 우리가 탄 조각배 위로 올라오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올라오시면 그분 한 말씀으로 역풍은 잔잔해질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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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주신 말씀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마르 6,45-52)
허기진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나서 예수님의 인기는 그야말로 상종가,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리고 홀로 기도하시고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 있습니다. 호수 위의 제자들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습니다. 풍랑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배를 거스르는 바람이 그들을 괴롭게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호수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문제는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죠. 유다인들에게 악한 세력은 호수나 바다 같은 물을 근거지로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라사 마을에서 더러운 영들을 축출하시자 그 더러운 영들을 돼지떼 속으로 들어가 급기야 호수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마르 5,12)
제자들이 호수 위를 걸어오는 형상을 보았을 때 두려워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게 보긴 보았지만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것, 그것이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현실입니다. 제자들이 제대로 못 보게 하는 것은 풍랑 때문입니다. 풍랑이 그들의 눈을 가려 버린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명이었습니다. 자의로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촉하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이모양이’야?‘ 그러게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맞습니다. 답도 길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거센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곳으로 보내십니다.
교부들은 호수 위를 건너가는 이 제자들의 배를 교회 공동체라고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풍랑 속에 시달리도록 보내신 것이죠. 그리고 우리 역시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거센 풍랑이 이는 곳으로 보내졌습니다. 안전하지 않은 곳입니다. 집어삼킬 듯,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먼저 광야로 나가셔서 악마의 유혹과 맞서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어쩔 수 없이 그 척박한 곳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복음은 예수님이 유혹이 난무하는, 사탄의 땅으로 가신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당신이 몸소 겪으시면서 알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 문제도 갈등도 어려움도 힘겨운 일도 없는 곳이 아니라 두려워 피하고 싶은 곳, 그곳에 가야 우리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지 나를 지켜주는 것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는 것을요.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듯 예수님도 제자들을 재촉하여 거센 풍랑 속으로 제자들을 밀어 넣어 버리시는 것이죠. 죽으라고 그러신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 다가오시는 예수님 당신을 발견하라고 말입니다. 그 속에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시는 주님과 함께 담대하게 저어 나가라고 말입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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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이 한 마디면 족합니다. 신앙이 본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면, “나다!”라는 예수님 한 말씀이면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체로 오시고,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의 이웃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만나시는데 우리는 왜 이리 부족함을 느낄까요. 호수의 맞바람을 이겨 내며 노를 젓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봅니다. 애를 씁니다. 땀이 납니다. 그만둘까 고민도 해 봅니다. 바람이 멎거나, 아니면 바람을 이겨 낼 초인적 힘이 주어지거나. 이러한 잡다한 생각들로 노 젓는 일이 더욱 힘겨워집니다. 자기 삶에 부족한 것이 많다고 느껴진다면, 넋을 잃고 헤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줄곧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고수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성공을 예수님께 투사시켰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예수님을 보기보다 영광 속의 멋진 예수님을 그려 나갔던 제자들은 늘 넋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마음은 채우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생깁니다. 행복하려고, 성공하려고, 이런저런 자기 계발서들을 읽는 우리의 노력이 커질수록, 우리의 결핍 의식은 더욱 또렷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부족한 마음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이웃을 있는 그대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는 우리의 망상 때문입니다.
혼자 애쓰고 노력하고 다듬는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함께 나누고 보듬고 채우면 세상은 놀랍게도 풍요롭고 행복해진다는 사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묵상해 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honephil 생각 |||||||||||||
오늘은 복음 말씀과 신부님들의 묵상 글을 읽으며 난 무슨 글을 쓰면 좋을까 조금은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 제자들에게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한편은 좀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지칭하거나 할 때 그 사람 참 인간적이야라고 말하면 그게 칭찬인지 아니면 정말 인간 이상으로 완전하다는 건지 조금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데 제자들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이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오늘도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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