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2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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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2020.1.6.)

by honephil 2020. 1. 6.

복음 말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17.23-25
그때에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0년 1월 6일 월요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세가지 동사( 마태 4,12-17.23-25)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 15 -17)

작금의 사회를 보면 참으로 빛 보다는 어둠이 지배하는 사회처럼 느껴집니다. 생명보다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절망의 사회를 바라보며 또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오늘의 말씀인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 15 -17)는 말씀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님 안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기다리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믿음 안에서 바라보는 과거는 우리를 반성하게 합니다. 딛고 서 있는 현재를 감사하게 합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에 두려움보다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시간이 참으로 빨리 감을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지나간 시간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반성하면서 하느님께서 나의 과거에 개입하셨던 사랑의 손길을 느껴 봅니다. 바로 현재는 이 반성을 통해서 확인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합니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기쁨의 흔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삶은 이를 발견하게 합니다.  다가올 미래의 사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합니다. 

하느님의 원래의 창조의 모습과 미래의 새로운 창조의 모습은 동일할 것입니다. 반성은 원래의 모습에서 사라지고 덧 붙여진 것들을 보충하고 깎아내야 하는 것을 살펴보게 합니다.  그리고 감사는 부족함에도 서 있는 현재에 대한 것입니다. 선물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리고 미래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희망과 기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봅니다. 당신께서는 돌아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십니다. 가르침과 선포와 치유하심이 예수님의 삶의 핵심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세 가지의 동사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동사의 의미가 아닌 우리가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 안에서 찾아내야 하는 동사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활자로서의 의미가 아닌 생명력을 갖고 살아 움직이는 의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받게 된다고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 계명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떨어진 말이 아닌 함께 가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며 사랑은 실천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그 사랑은 완전하지 못한 사랑일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회개와 하늘나라를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회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살기 위한 조건입니다. 내가 믿음과 사랑의 삶에서 유리되어 있었다면 다시 그 믿음과 사랑의 삶에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의 일을 하면서  자신처럼 일을 하지 않는다고 힘들어하는 많은 분들을 보게 됩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자기만큼 열심히 교회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는 것은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신앙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옳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하는 교회의 일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따라서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교회의 일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일이면, 나를 드러내기 위한 일이면,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실망하기도 좌절하기도 할 것입니다.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피곤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어야 합니다. 인간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와 있는 하늘나라에서  살아가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초대에 응답하는 거룩한 하루를 지내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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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 갈릴래아는 외롭고 슬픈 곳이었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하여 무시당하였고, 가진 것이 없다고 업신여김을 감내해야 하였던 곳이지요. 이뿐인가요? 살다 살다 힘들면 동네 밖 도적 떼라도 되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이들이 넘쳐 났고, 급기야 로마의 권력에 저항하는 목숨 건 무장 항쟁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에서는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소리나 한번 지르고 죽자.’라는 심정과 태도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더불어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갈릴래아 곧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의 자리에서 선포되고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곳은 모두 가난한 지역이었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자리는 성공한 이들이 넘쳐 나는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성공한 이들을 탓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지만,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고 세상의 성공에만 혈안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바라볼 때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모두가 축구 경기를 응원할 때도, 축구를 싫어하는 이들이 있음을 인식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이웃 나라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극우주의자들과 선량한 국민들을 구별하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집단주의, 국가주의, 애국주의 …  ‘○○주의’라는 것들, 이것만이어야 한다는 사상들, 그것이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너무 다릅니다. 너무 달라서 틀렸다 하고 저주하고 심판하고 외면합니다. 올바로 식별하고 다른 것을 다르게 볼 줄 아는 여유, 조금씩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honephil 생각 ||||||||||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본격적인 활동을 보여줍니다. 마치 이 복음을 읽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갈릴리호수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시면서 여러 병든 이를 고쳐주시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 앞에 펼쳐집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사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는데, 그곳은 바닷가라고 나와서 좀 의아했습니다.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가 갈릴리 호수인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바다라니.

그래서 구글 맵으로 확인을 해보고서야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게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갈릴리 호수는 바다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곳을 바다로 불렀던 거 같습니다. 그만큼 이 호수가 어마어마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에 보시면 아시듯 이 갈릴리 호수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은 바로 요르단 강입니다. 

이 지역은 사진에서 보듯이 녹지가 거의 없고 사막과도 같이 척박한 지역입니다. 그러니 이곳을 흐르는 요르단이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생명의 젖줄인셈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본격적인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펼치신 것입니다.

바다와 같은 갈릴리 호수를 생각해보면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나사렛, 카파르나움, 티베리아스, 갈릴리 호수 - 구글 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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