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4-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4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0년 1월 7일 화요일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삶(마르 6, 34-44)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 6, 37)
새해를 시작하면서 본당의 사목지표를 ‘축복의 통로가 되는 공동체’로 정했습니다. 항상 받는 데에만 익숙해 있던 저희 공동체가 이제는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나누는 공동체, 베푸는 공동체로의 전환이 있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주변의 상황이 어렵고 각박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나누고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어렵지만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의 실천이며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변의 소외되고 힘없는 약자에 대한 사랑의 관심을 보여주십니다.
물질에 애착을 가진 사람은 가진 자만을 따라다닙니다. 소유의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재물을 소유하는 이유를 모릅니다. 물질에 대한 소유가 필요에 의한 것이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그 필요에 의한 소유 추구가 주체를 객체로 만들고 객체를 주체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도식을 깨뜨리는 삶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느낍니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 1서4, 8)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가 하고 질문을 해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존재입니다. 누구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소유의 유무와 지식의 유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인간의 선별적인 사랑과의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있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이유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만을 사랑하는 편협적인 사랑이 아닌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의 모범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가지십니다.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먼저 이들의 간절한 바람을 가르침과 치유로 채워주십니다. 이 순간까지도 군중들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마도 이들의 간절함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던 제자들이 배고픔을 먼저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당황한 제자들은 세상적인 논리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어 놓으라고 하십니다. 바로 기적은 내가 가진 것을 내어 놓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볼 필요도 없이 사제로서 살아가는 저의 마음도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만을 사랑하는 그러한 유혹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은연중에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마음속에도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오천명을 희생시키는 그러한 유혹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희생으로, 나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음으로 오천명을 살리는 기적을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시편 23편의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시편 23, 1-2)라는 시구를 묵상해 봅니다.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군중을 풀밭에 앉게 하시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주님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조건 없는 내어놓음, 물질뿐만 아니라 시간과 재능까지도 내어 놓는 삶을 실천하는 거룩한 하루 되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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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군중을 바라보는 마음이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을 따르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을 참으로 가엾게 여기십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께서는 허기진 군중을 배불리 먹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다릅니다. ‘그냥 저들을 돌려보내서 각자가 능력껏 먹을 것을 사 먹도록’ 하자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군중 가운데에는 빵을 구할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굶어야 할 형편인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처지는 단지 그들의 사정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 6,37) 제자들은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볼멘 대답을 합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 나타난 제자들과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세상의 기적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기적은 ‘옹졸하고 고집 센’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적 사건을 마치 하늘에서 빵이 펑펑 쏟아진 마술처럼 이해한다면, 그 기적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옛이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기적 사건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체험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나눔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빵이 부족해서 지구 저편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처럼 이 핑계 저 핑계로 나눔을 주저하는 우리의 ‘굳게 닫힌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기적은 오늘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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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마음”과 연관된 그리스어 동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것은 내장이 끊기는 아픔을 가리키는데, 우리말로 ‘애가 녹는다.’ 정도로 번역이 되겠지요. 예수님의 마음은 불쌍한 이를 측은히 바라보시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그 불쌍한 이와 같은 처지, 한마음이 되어 함께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그럼, 누가 불쌍한 사람일까요? 한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굳이 빗대어 보자면,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아닐까 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가장 낫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함께’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의 가치에 얽매여 ‘함께’의 길을 잃어버린 제자들, 그들이 바로 목자 없이 헤매는 양들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실은 아주 적습니다. 필요한 것의 양이 절대화되는 이유는 삶의 자리가 불안하기 때문이지요.
불안함을 덜어 내는 것은, 앞다투어 쫓아가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서로 다른 삶의 처지에 함께하려는 마음이고, 그 마음이 모여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제도와 법이 생기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무한한 사랑이나 자비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나눔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의 초대가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제 것이라도, 함께 나눌 것인가, 혼자 누릴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honephil 생각 |||||||||||||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른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합니다. 그런데 같은 마르코 복음 8장 1절에는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그리고 비슷한 내용이 마태오복음 15장 34절에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는 조금 있는 것으로 이 또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서에 따르면 총 두 번에 걸쳐 구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신 셈이 됩니다.
어제 우연히 한 TV 채널에서 신조어인 플렉스 Flex에 대하여 방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조우종 아나운서와 이상민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특정한 주제를 정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뉴스에 순위를 매겨 방송하는 프로그램인데, 흥미로운 주제가 있으면 보게 됩니다.
이날 주제는 플렉스였는데, 이게 원래는 운동 전에 준비 운동으로 몸을 푸는 것을 의미했는데, 신조어로 이제는 '돈 자랑하다'라는 뜻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날 방송된 내용을 보면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갑부들이 일반 서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들여 갖가지 형태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오늘 이 복음을 읽으며, 만약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어떤 갑부가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돈을 대겠소. 하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 상상을 해 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오늘도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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