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말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4-22ㄱ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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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9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넷째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사명'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사명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한처음 시간이 생기기 전, 말씀은 하느님이셨네. 그 말씀이 세상의 구원자로 태어나셨네"(입당송).
이처럼 입당송은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시던 말씀이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심을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구원자(고엘)'는 가난한 형제의 빚을 대신 갚아 주거나, 형제의 넘어간 토지를 되사서 돌려 주는 이, 후손을 이어주고, 피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이를 가리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루카 4,14).
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사십 일 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루카 4,1)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같은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이사 61,1-2)을 인용해 당신 사명을 밝히십니다. 곧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빛을,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이 사명의 완성이 곧 "주님의 은혜로운 해"인 희년의 도래입니다. 희년에는 제 소유지를 되찾고 거룩히 지냅니다(레위 25,8-13 참조). 모든 것은 잃고 무너지고 손상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에 하느님께서 처음 주셨던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사실 이 말씀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신의 도래와 희년을 동일시하신 것이니까요. 주님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메시아로서 해방과 치유, 되살림과 되찾음, 기쁜 소식의 주체가 곧 당신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이스라엘이 지켜오던 구원자(고엘)의 의무들을 넘어섭니다. 이는 영성체송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영성체송).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화폐가 아니라 당신 생명을 지불해서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구원입니다.
제1독서는 사랑의 사도 요한의 편지답게 계속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형제와 이웃을,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골자로 짚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렇듯 한 뿌리입니다.
오늘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의 사명은 전부,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을 향해 있으며, 그들의 온전함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위로해 드리는 일이라고 역설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빼앗기고 억압 당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모상성을 회복하도록 새 출발선을 마련해 주는 일, 새 도화지를 펼쳐 주는 일이 곧 예수님의 사명이자 희년이신 분의 아버지 사랑, 형제 사랑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당신의 사명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그분 존재가 곧 희년이시기 때문이고, 또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듣는 이들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치유와 해방, 기쁨과 자유의 실타래는 내면 저 깊숙한 곳에서 이미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지방에"(루카 4,14)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루카 4,15)
"모든 사람의 눈이"(루카 4,20)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루카 4,22)
오늘 복음 대목에서는 "모두, 모든"이라는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이 네 차례나 등장합니다. 이는 어느 정도의 과장이 포함된 표현이기도 하지만 전체성을 염두에 둔 의도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이 "모두, 모든" 안에는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뿐만 아니라 동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론 이방인들도 포함됩니다. 또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와 미래의 인류까지, 잠재적 하느님의 자녀들 전부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두의 눈앞에서 구원자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희년을 7년이 일곱 번 반복된 후 맞는 50년째 해를 가리킵니다만, 우리는 숫자보다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계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은 저마다 희년을 맞아,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열리면 주님께서 나의 어떤 부분에 치유와 해방, 기쁨과 자유를 선사해 주시길 바라십니까? 아마 저마다 다르겠지요.
잠시 숙고해 보시고 주님 앞에 그 부분을 펼쳐 놓은 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 부분에 깊이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귀를 뚫고 들어와 심장을 관통하고 영혼에 번져갈 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시는 단호한 선언이 여러분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 해방을 얻고 자유로워져 마음껏 행복하시길 축원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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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핵심적 가치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가리키는 메시아 시대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이 자리, 이 시간에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메시아가 어디 있는지, 은혜가 어디 있는지,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복음을 읽으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주어지는 이들을 되짚어 봅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가난한가? 나는 잡혀갔는가? 나는 눈이 멀었는가? 나는 억압받는가?’우리가 외면한 이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은총을 진하고 강하게 체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 덩그러니 홀로 있게 되었을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토닥여 준다면, 참 고맙겠지요.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한 은총은, 삶이 무너진 이들이 받아 누리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잘살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허전하고 외로워지지 않습니까? 외롭지 않다며 으스대는 가식의 옷을 벗어 던지고 서로의 손을 잡아 줄 줄 아는 따뜻함이 구원입니다. 루카 복음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갑니다. 그 길에는 가난한 이, 다리저는 이, 눈먼 이들이 늘 함께합니다.
우리는 위로받고자 합니까, 위로받기를 부끄러워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참된 은총을 받고자 합니까, 누군가에게서 저만을 위한 거짓 은총을 얻고자 늘 어딘가를 헤매고 있습니까?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honephil 생각 ||||||||||||
오늘 복음은 루카 사도가 쓴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레아를 거쳐 나사렛으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계속해서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는 구절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듣는 가운데라는 부분일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말은 혼자하는 독백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상대방이 내 말을 들을 준비나 자세가 되어 있어야 진정한 대화가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이런 말은 아는 사람과의 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경험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기보다는 자기 얘기를 들어주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들어주는 척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말씀은 예수님이 하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 가운데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은 말들을 하고 또 많은 말들이 우리의 귓전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때로는 듣기 싫은 말, 혹은 들어도 별 느낌이 없는 말, 또 때로는 귀가 번쩍하고 뜨이는 듯한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도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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