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20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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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2020.1.4.)

by honephil 2020. 1. 4.

오늘의 복음 말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0년 1월 4일 토요일

무엇을 찾느냐?(요한 1, 35- 4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요한 1, 38)

행복한 삶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입니다.  문제는 어떠한 행복을 추구하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소유하는 행복과 비움의 행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세상적인 소유의 개념과 영적인 소유의 개념입니다.

세상적인 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서 살겠다고 입만 열면 외치는  정치인 들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들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실망합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말을 뒤엎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가장 대조적인 대표적인 사람들이 정치인들 같이 보입니다. 국민을 행복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정치인들이 공동체의 선과 이익은 도외시 한채 자신 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세례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닦는 모습을 몸소 실천하심을 보여주십니다.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을 배려하는 모습입니다. 뒤에서 오시는 분께서  당신의 사명을 더욱 잘 실천하시도록  자신의 소중한 제자들을 에수님께로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눈여겨 보며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어린 양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어린양의 의미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빠스카의 어린 양입니다. 이스라엘이 파라오의 압제에서 탈출하기 전날 밤에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릅니다. 이러한 이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로 이들은 이집트의 모든 맏배를 치시는 하느님의 벌로부터 자신들의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어린양은 사실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 없는 양이 죽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그 속죄양이 되는 어린양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사야서(53,7) 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 나오는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그 양은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기 백성을 위해 말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의 모습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말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말 중에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다.” 라는 말의 의미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없애다’(희랍어로 άirein)라는 동사는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제거하다’ ‘없애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없앤다.’ 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죄’란 당시의 유대인의 죄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람이 짓는 ‘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단어 속에서 예수님의 보편 구원 사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당신의 첫 번째 제자들과의 대화하시는 그 내용이 우리에게는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하는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의 피상적인 의미는 “나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나?” 하는 것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너희가 인생을 살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답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주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는 동문서답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질문에 담긴 의미는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스승인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들었기에 ‘선생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는 원의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질문을 하는 의도가 예수님께서 살고 계시는 곳의 삶의 편 불리를 따지기 위한 의도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버리고 어떠한 십자가를 지고 다가가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셋째는 안드레아는 가서 보고 와서,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하며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하고 질문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을 마음에 간직하며 언제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 사무 3, 10) 하고 대답하는 사무엘의 말이 바로 우리의 응답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는 더욱 작아지고 예수님이 더욱 커지시는 삶을 사는 거룩한 하루 지내시도록 기도 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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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모여드는 사람들의 바람과 갈망은 다양하다 못하여 어지럽습니다. 진학, 사업, 건강, 성공, 행복 등은 제쳐 놓더라도 제 신념에 대한 확증이나 사람끼리 부딪쳐 상처 입은 영혼의 처절한 외침까지, 예수님을 찾는 이들의 가슴은 그렇게도 답답하고 먹먹한가 봅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요한의 두 제자가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였을까요? 메시아? 그럴 테지요. 다만 그 메시아가 각자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보장해 줄 메시아일 수도 있고, 제 신념이나 가치관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줄 메시아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한마디만 건네십니다. “와서 보아라.” 중요한 것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저마다 다른 뜻과 바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을 서로 다른 것으로 놓아둘 수 있는 일, 쉽지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는 길에 필수적인 과업입니다. 신자로서 잘 살아야 된다는 사명감 아래,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덕목들을 순수한 신앙의 가치들과 뒤섞어 놓는 일이 많습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반드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가치는 인간의 모든 것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무모하지만 용기를 내어 결단해야만 하는 끝없는 회개로 초대된 사람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honephil 생각 |||||||||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행적이라고 봐야 하나요? 아니면 이 복음을 쓴 사도 요한인가요? 좀 헷갈립니다. 그래서 검색을 해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시몬 베드로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이므로 오늘 복음 말씀의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 맞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쓴 사도 요한은 안드레아 시몬 형제와 같이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는 형제지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따르면 요한의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확실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제자는 딱히 누구라고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아가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니 예수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때 요한은 사도 요한인가요? 아니면 세례자 요한인가요? 또 아니면 다른 요한인가요?

물론 이런 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물음이 갑자기 생기는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케파' 즉 '베드로'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시몬이 예수님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먼저 알아챈 사람은 동생 안드레아였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몬이 동생의 안내로 예수님을 뵙자 예수님은 이 시몬을 교회의 반석이 될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런데,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다른 복음에서는 이 두 형제, 안드레아와 시몬이 어부였는데,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게 마태오, 루카, 마르코 복음 셋 중의 하나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이 그 과정이야 어찌 됐던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뜻에 따라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그는 초대 교황으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시몬 베드로가 나는 별생각 없는데 요하였으면 아마도 동생 안드레아가 초대 교황이 되었을까요? 물론 이런 역사에 대한 가정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이 훌쩍 넘은 때입니다. 이 시간의 길이나 깊이는 잘 감이 안 옵니다. 그런데 지구가 생겨난 게 65억 년 전이라고 하는 데, 이것에 비하면 2천 년도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가끔은 아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디서 어떻게 또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나 이전에 있었고, 또 지금 나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서 온 사람들이지?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 오늘은 유난히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입니다. 날씨 탓일까요?

 

오늘도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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