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오 18,15-20)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2021.8.11.)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오 18,15-20)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2021.8.11.)

by honephil 2021. 8. 11.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다. 1253년 선종한 그녀를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클라라 성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 감동받아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 사부인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가난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지금도 아시시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가보면 당시 수도 생활이 얼마나 단순 소박하며 가난과 기도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클라라 성녀의 침실은 맨바닥에 약간의 풀을 모아 침대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성녀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가난함을 얼마나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녀가 숨을 거둔 자리에 있는 장식 없는 십자가는 그녀가 한평생 얼마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십자가를 바탕으로 한 예수님에 대한 관상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이어집니다. 1240-1241년 사라센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심한 병 중에 있던 클라라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들과 수도원을 구하고자 성광에 성체를 모시고 나가 적군 앞에 섭니다. 성녀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흘러 나와 사라센 군대는 그만 두려움에 도망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성녀의 가장 큰 미덕은 겸손한 생활입니다. 40년을 수도원장으로 지낸 그녀가 가장 좋아한 일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씻어 주고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단장하십시오.” 매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라는 성녀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되시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극히 놀라운 겸손과 비할 수 없는 가난을 배웁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바라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거울 삼아 우리를 비추어 보아야겠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

 

<사랑의 공동체에 꼭 머물러야 하는 이유: 사귐에 원한이 없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둘이나 셋,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개인적으로는 말할 자신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잘못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래서 죄가 됩니다. 개인적으로 말해줄 용기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 잘못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상대와의 감정이 상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내면에는 나의 감정도 다치기 싫고 상대도 잃기 싫은 복합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잘못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해 줄 용기가 없다면 어차피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집착이고 무관심입니다.

 

    집착과 무관심은 반대 같지만 실상 같은 심리입니다. 애인이 없을 때는 결혼 안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애인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목을 맵니다. 그러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좋습니까? 매우 무섭습니다. 내가 떠나려고 할 때 어떤 일을 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떠날까 봐 나에게 잘못을 해도 그 잘못을 절대 말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상대가 나에게 잘못하는데도 그냥 참아내고 있는 것은 다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공동체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가족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살 수 없다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또 상처받기 싫어서 아예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혹은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니면 더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고, 자기 안에 고립되는 이유는 더는 아프기 싫어서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못해도 그냥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던가를 선택합니다.

 

    김창옥 강사가 ‘어쩌다 어른’에 나와서 ‘학창시절 많이 놀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강의한 것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학교 다닐 때 놀던 여자들이 시집을 잘 갈까요? 시집을 잘 간다는 것을 세속적으로 표현해 볼게요.

첫째 남편의 경제력이 매우 좋습니다. 둘째 남편과 너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셋째 그 여성은 이제 놀지 않습니다. 교회 권사님이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회개했습니다. 많이 놀아봐서 원이 없습니다. 오빠들도 너무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러니 더는 한이 없습니다. 이제 만날 오빠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넷째 항상 감사합니다. 이것을 자족(自足)이라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이 사람들은 원(願)이 없습니다.

 

    놀아봤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원(願)이 한(恨)으로 바뀝니다. 원과 한의 합성어가 무엇입니까? 원 + 한 = 원한. 원한이 있는 귀신은 어디를 떠돕니까? 구천! 현대 사회의 구천이 어디예요. 백화점. 아무것도 안 사면서 그냥 걸어 다닙니다.”

 

    웃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은 언제 원한이 쌓일까요? 사랑받지 못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 원한으로 귀신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안에 고립되거나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도 못 하는 집착으로 휘둘리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마치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물건도 사지 않으면서 백화점을 계속 걷는 사람의 모습과 같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별의 아픔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 나은 사람을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의 아픔이 감사함이 됩니다. 그 사람과 계속 사귀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누군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사람이 돌아갈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무슨 자신감 때문인지 자신에게 잘못된 것을 말해주고 충고도 해 줍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자신을 떠나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쁜 남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표상입니다. 그 안에 머물면 더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원도 없고 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꼭 속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용기 있게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꼭 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에 머무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용기 있고 당당하고 또 이타적인 사랑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MC4PqPpm_cc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오 18,15-20)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2021.8.11.)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마태 18.20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Mt 18.2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