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21─19,1)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202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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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21─19,1)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2021.8.12.)

by honephil 2021. 8. 12.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베드로 사도가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번도 어려운데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니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예수님께서는 다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합니다. 임금은 일만 탈렌트(1탈렌트=6천 데나리온)라는 엄청난 빚을 진 종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그를 놓아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자마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데나리온=당시 노동자의 일당)을 빚진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임금이 이 종을 불러들여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이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줍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9항). 이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자비의 얼굴」, 6항).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때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인간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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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수천 번을 해도 죄가 용서되지 않는 경우>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주제입니다.

임금이 일만 탈렌트, 곧 수조 원의 돈을 탕감해 주었지만, 그 종은 백 데나리온, 곧 수백만 원의 돈 때문에 친구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임금은 돈을 탕감해 준 것을 다시 물립니다.

 

    그러니까 한 번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그 용서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나의 자세에 따라 용서가 번복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일까요? 내가 타인을 용서하지 않을 때입니다.

 

    용서는 마치 내가 통로가 되어 받은 용서가 타인에게 흘러갈 때 나의 것이 되는 것이지 받기만 해서는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받는 모든 것을 똑같이 그것을 흘려보낼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됩니다.

 

    ‘이방원의 난’이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죽이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방번, 방석도 모두 죽이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오른 사건을 말합니다.

 

    이방원에게 이런 힘을 실어주었던 것은 부인 민씨의 가문이었습니다. 민씨 가문은 이방원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권력을 쥐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민씨에게는 얼굴이 어여쁜 김씨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민씨는 장차 임금이 될 이방원이 여종에게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얼굴을 싸매고 다니도록 하였습니다. 민씨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권력이 또 양분되어 형제간에 칼부림이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집에 살면서 여종의 그러한 행색을 보지 못할 리 없는 이방원은 그 여인에게 푹 빠지게 됩니다.

 

    민씨는 여종을 죽이는 대신 내쫓아 사라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이방원은 아내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찹니다. 어쨌든 이방원은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태종 임금이 됩니다. 그리고 민씨는 원경왕후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때 태종은 한 사람을 부르는데 아기를 안고 나타난 김씨입니다. 태종은 이미 김씨를 찾아 아기를 출산한 것입니다. 그리고 효빈 김씨로 후궁으로 삼습니다. 분노하는 민씨 세력에 태종은 후궁들을 더 들여 권력을 분산하여 민씨 세력의 휘둘림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이 아내 원경왕후의 눈을 피해 취했던 미모의 여종’, 유튜브, ‘야사TV’]

 

    민씨는 권력을 쥐기 위해 태종을 독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그 시샘 때문에 오히려 태종의 마음을 잃게 됩니다. 만약 태종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물론 후궁을 두기는 하였을지라도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든 민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접지 않았을 것입니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내가 소유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생명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흘려보내는 것만 내 것이 됩니다.

 

    만약 돈을 엄청나게 벌어놓고 하나도 쓰지 않고 죽었다면 그 사람은 돈을 소유했던 것일까요? 돈은 쓰는 것만 나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휴짓조각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모기가 태어나서 피를 좋아하는 욕구를 받았는데 이것을 쓰지 않았다면 그 욕구는 자신의 것일까요? 굶어 죽습니다. 무엇이든 쓰는 것이 나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커다란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흘려보내는 갈릴래아 호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아들이기만 하는 사해라는 호수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바다이고 사해는 죽은 바다입니다. 이 큰 상징적인 지형만으로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흘려보내지 않는 용서는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수천 번 고해성사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고해성사로는 용서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처럼 내가 받은 용서를 흘려보내 주지 않으면 다시 용서받지 못한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https://youtu.be/Tavg9 etaWUc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21─19,1)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2021.8.12.)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이리 가까이 와서

주 너의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여호 3.9

 

Come here and listen to

the words of the LORD,

your God.

Jos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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