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마태오 17,22-27) -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20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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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마태오 17,22-27) -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2021.8.9.)

by honephil 2021. 8. 9.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2-27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와 성전 세를 바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왜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함께 들려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지만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베드로가 납득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지만(마태 16,21-23 참조), 두 번째 수난 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몹시 슬퍼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올 부활과, 그로 말미암은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슬퍼합니다.

 

성전 세는 스무 살 이상의 모든 유다인 남자가 주님께 드리던 예물입니다. 성전은 유다인들의 삶과 신앙의 중심이었고, 그 성전을 유지 관리, 보수하고 전반적인 운용을 하는 데에 성전 세가 쓰였습니다. 그런데 서기 70년 8월 29일 로마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서기 80-90년 무렵 복음을 쓸 때,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성전 세 이야기를 할까요? 유다인의 삶과 신앙의 중심인 성전이 여러 상품을 사고파는 장사의 소굴이 되고,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성전 세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의 소굴이 된 성전을 정화하시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마태 21,12; 26,61; 27,40 참조).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는 그 성전은 허물어졌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심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강조합니다. 목숨까지 다 바치신 그 사랑은 영원하며,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물건이나 세상의 것을 기대할 것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사랑, 곧 목숨까지 바치신 그 험난하고 지극한 사랑을 믿을 것인지를 말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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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불완전한 겸손, 완전한 겸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세’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둘은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당시 한 사람당 두 드라크마를 성전세로 바쳐야 했는데, 이는 이틀 치 노동 품삯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느냐고 베드로에게 따지자 베드로는 내신다 말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예수님께서 당신은 성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 내도 되지만 물고기를 잡아 그냥 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집에 오셨는데 그 하인들에게 집세를 내고 당신 일을 함께하는 동료인 베드로에게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도 큰 겸손입니다. 인간이 개가 되어 개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을 위해 잡아먹혀 죽는 것보다 더한 겸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참다운 겸손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십니다. 오늘은 겸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겸손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열등감’입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열등감일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라고 하면 “저는 능력이 없어서 못 해요.”라고 하던가, 큰 꿈을 가지라고 할 때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이 사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큰일을 하려고 할 때, “당신은 교만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그렇고 남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열등감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과 같습니다.

 

    저도 괜히 위대한 신학자들이 한 말을 반박하다가 이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당신은 교만합니다. 그분들은 고위 성직자이시고 위대한 학자신데 나이도 어린 당신이 어떻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하지만 이런 말들은 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살 때 예루살렘 학자들과 토론을 하셨습니다. 그건 예수님이니까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제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돼요. 말도 안 돼요.”라고 대답하셨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열등감이었을 것입니다. 겸손하다고 결코 위대한 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불완전한 겸손’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고 큰 상을 받을 때 이렇게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다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왜 불완전한 겸손이냐면 ‘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가 아버지가 다른 형제에게는 많은 것을 해 주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겸손하게 ‘저는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겨 무엇을 청하는 것은 물론 겸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가 살아있어서 자신의 영광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조금이라도 주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완전한 겸손’은 무엇일까요? 오늘 베드로가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더는 내려가실 곳이 없습니다. 마치 물고기와 같은 신세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물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나온 한 스타테르를 예수님과 자신을 위한 성전세로 봉헌합니다. 한 스타테르는 네 드라크마와 같은 액수인데 곧 두 명의 성전세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겸손에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의 겸손이 나의 겸손이 된 것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지 않으면 이 겸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씨름을 배운지 3개월 만에 전국 대회에서 1위를 휩쓸어 ‘영재발굴단’에 나왔던 이신이란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탈북자 2세입니다. 엄마가 임신한 채 탈북하여 중국에서 갖은 고난을 겪으며 결국엔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신이는 종일 고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허리가 아픈 엄마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합니다. 정말 중학생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신이는 자신을 데리고 살아온 엄마의 고달픈 삶을 잘 압니다. 쌍둥이를 임신한 몸으로 목숨을 걸고 탈북했지만 그 이후의 삶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기름을 짜는 일을 종일 하였고 기름을 짜고 남은 것으로는 돼지 사료를 끓여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밤에 하는 일이었고 낮에는 고물을 주워 고물상을 하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몸이 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신히 한국에 들어온 지 두 달 만에 몸이 안 좋아 여러 번 수술해야만 했고 이후에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신이는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 아이들에게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욕도 많이 들었고 북한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질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씨름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 운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석 달 만에 중학교 씨름 1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국 체전에서 발목을 다쳤습니다. 재활하며 보디빌딩도 겸해서 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집중하여 4개월 만에 고등부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몰아붙인 이유는 오로지 어머니의 고생에 자신도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참다운 겸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뜻에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그리스도의 겸손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위해 돈을 직접 주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당신 뜻에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아 입을 벌리면 돈이 나온다는 말에 순종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은 나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뜻이 내 안에서 실현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겸손과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완전한 겸손입니다.

 

https://youtu.be/ulT8gLDFhvQ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마태오 17,22-27) -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2021.8.9.)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보라,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것이다.

신명 10.14

 

Look,

the heavens, even the highest heavens,

belong to the Lord,

your God,

as well as the earth

and

everything on it.

Dt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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