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네오 성인은 1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품을 받고, 뒤에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이레네오 주교는 특히 프랑스의 영지주의의 오류를 거슬러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다. 2세기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한 그는, 영지주의 이단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이단 논박』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성인은 200년 무렵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를 따라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열 명도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열 명만 있었다면 그곳은 비록 죄악이 가득했지만 구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 명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상대로 흥정합니다. 의인 쉰 명에서 시작해서 깎고 깎은 끝에 의인 열 명으로 하느님과 합의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소돔은 말 그대로 파멸됩니다. 의인 단 열 명이 소돔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 수가 제법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 성경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노아, 다니엘, 그리고 욥, 단 세 사람뿐입니다. 놀랍지 않은가요? 구약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 단 세 명만이 그 이름이 언급되면서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죄악이 가득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은 적은 수였을까요? 아니면 많은 수였을까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드라마인 구약 성경 전체에서 단 세 명만이 의인이라고 불렸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죄악이 가득한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은 매우 많은 수였습니다. 어쩌면 그곳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죄로 가득한 도성에도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의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에 의인은 얼마나 될까요? 열 명의 수가 많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부터 의로움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내디뎌 보면 어떨까요? 그 발걸음은 나와 우리 공동체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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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가난과 고단함을 감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가족과 사람들의 애정을 다 포기해도 되겠냐고 묻는 것입니다.
가난해지고 고단해지고 관계가 단절되고 멸시받고 미움받는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이 세상에서 잃는 행복보다 더 행복하지 못하다면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 김광석의 노래 제목 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기로 한 사랑은 그 사랑 때문에 잃어야 하는 고통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잃는 아픔이 더는 아픔이 아닌 사랑을 해야 합니다.
폭풍의 언덕은 영국의 에밀리 브론테가 1847년 발표한 소설입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wuthering heights)이라는 곳에 언쇼가와 린튼가가 언덕 위와 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언쇼가의 주인 언쇼가 어느 날 고아인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우면서 시작됩니다. 고아로 들어온 히스클리프와 언쇼의 딸 캐서린의 격정적인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전편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언쇼가에 들어온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히스꽃이 만발한 ‘워더링 하이츠’에서 서로 사랑하지만, 캐서린이 아래 동네에 있는 린튼가의 지주 아들인 에드거와 결혼하기로 하면서 사랑이 깨어집니다. 결국, 히스클리프는 가진 것이 없는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히스클리프는 주인인 언쇼가 죽고 캐서린이 결혼하자 폭풍의 언덕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 후 3년이 지나 돈을 벌게 된 히스클리프는 언쇼의 아들 힌들리를 도박에 빠지게 하여 힌들리의 전 재산을 빼앗습니다. 언쇼의 아들 힌들리는 고아가 자기 집에 들어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에 대해 내내 히스클리프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버리고 돈을 선택한 캐서린에게도 복수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캐서린의 남편 여동생인 이자벨라를 유혹하여 아들까지 낳습니다. 히스클리프의 아들을 낳은 뒤 이자벨라는 죽습니다. 이자벨라는 히스클리프가 결국은 자기가 아닌 캐서린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남편의 동생과 아이를 낳은 히스클리프를 보며 캐서린도 딸을 하나 낳고 죽습니다. 캐서린과 그의 남편 에드거가 모두 죽자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아들 린턴과 캐서린의 딸을 결혼시키며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성사시킵니다. 그리고 에드거의 재산까지 모두 빼앗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워했던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턴을 내쫓습니다. 이렇게 모든 복수를 한 다음 히스클리프는 첫사랑 캐서린의 환영을 쫓으며 죽어갑니다.
히스클리프는 이자벨라와 결혼했지만, 마음으로 캐서린을 여전히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벨라는 무엇이었을까요? 히스클리프가 복수하는 데 쓰인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렇듯 사랑을 위해 다른 애정을 끊을 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죽은 이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치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자녀를 잃었다고, 부모를 잃었다고, 친한 친구를 잃었다고 그렇게 만드는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는 말은 이전에 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캐서린은 어떻습니까? 결국엔 사랑보다 돈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전에 히스클리프와 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돈과 혼인하기 위해 히스클리프는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만약 집이 망했다고, 거지가 되었다고,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그리스도를 원망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채워주실 세상 영화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를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꼬실 때, 이러저러하게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말로 꼬드깁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누군가를 꼬드겨서 결혼해봤자 그 결혼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사랑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관계 내에서 오는 행복이 그것을 위해 잃는 모든 아픔보다 항상 더 커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때 ‘신학교에서 잘리면 뭐 성 프란치스코처럼 거지로 살면 되지!’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어 많은 것을 갖게 된 지금은 사제라는 이름과 지금까지 쌓아놓고 가지게 된 것을 잃을까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 감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따르기 위해 이 세상 모든 것을 잃는 아픔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잃는 것이 너무 아프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사랑은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행복한 그런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된 노래 하나를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전인권 씨의 ‘사노라면’의 일부입니다. 세상 모든 고통을 초월하게 할 사랑을 합시다. 사랑이 곧 행복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행복 자체이십니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겁지 않더냐.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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