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이나 이날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이 교황 주일에는 교황의 사목 활동을 돕고자 특별 헌금을 한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자, 열두 살 어린 소녀. 열둘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입니다. 한 명은 난치병을 앓았고 다른 한 명은 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를 마주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에게는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하였다는 교집합이 생깁니다. 물론 한 명은 예수님을 능동적으로 찾아가서 예수님께 손을 댔고, 다른 한 명은 수동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손이 잡혔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닮은 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갈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도 하고 예수님께 붙잡히기도 합니다. 숱한 고생을 하고 많은 의사에게 가진 것을 다 쏟아부으며 열두 해를 보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아픈 딸을 고쳐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그분을 집으로 모시고자 하였지만, 집으로 가는 동안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예수님을 더 수고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던 회당장은 어떻게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마주한 상황은 비록 다른 모습이었지만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처지라는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만났습니다.
그러한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닙니다. 적당한 인간적 사고 안에서 만들어진 타당성의 결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때로는 무모하게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기도 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그분께서 건네시는 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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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적이라도 청해야 하는 이유: 더 큰 기적을 믿기 위해>
오늘 복음은 두 치유의 기적을 소개합니다.
처음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아프다고 하여 치유하러 가시다가 하혈병 여인이 치유됩니다. 하혈병 여인이 치유된 이유는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면 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만 있다면 무엇이든 주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치유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이때 딸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칠 힘을 지니신 저분께서 죽은 사람은 살리실 수 없으실까?’
다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는 힘이 곧 죄를 용서하는 힘과 같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병을 고치는 힘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힘은 같은 원천에서 나옴을 말해줍니다. 이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믿음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이의 병을 치유해주고 죄를 사해주며 심지어 생명까지 다시 넣어주시는 힘이십니다.
이렇듯 작은 것을 보고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바로 ‘묵상’에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회당장 야이로는 하혈병 여인의 치유를 보며 자신의 딸도 살아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 야이로는 분명 하혈병 여인의 치유를 통해 죽은 자신의 딸도 살아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시는 분이 영원한 생명도 주십니다. 어떤 것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는 자동차를 고칠 수 없습니다.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칠 수 있다는 말은 설계도와 에너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설계도와 에너지가 있으면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장 난 것은 작게 죽은 것이고, 망가진 것은 크게 죽은 것입니다. 작게 죽은 것을 살릴 수 있는 분이 크게 죽은 것도 살립니다.
우리 주위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생명의 원천도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을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믿음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기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는 ‘루르드 성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루르드에서 치유의 기적이 보고된 것은 7000여 건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기적들이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수많은 의사의 오랜 조사가 필요합니다.
이때 ‘루르드 의료국’이 소집되는데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분야의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적의 조사는 10여 년이 소요됩니다.
그렇게 루르드 의사국에 의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 인정되고, 또 그것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초자연적 현상이라 믿어지는 기적은 현재까지 70건입니다. 기적 중의 단 1%만 이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다.
마지막 70번째 공식적 기적은 2018년에 공인된, 하반신 마비가 치유된 한 수녀님의 사례입니다. ‘베르나데트 모리오’ 수녀는 허리 신경근이 압박을 받아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허리 통증과 하반신 마비 증상은 그가 27살이던 1966년부터 시작됐습니다.
모리오 수녀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4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1980년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한쪽 다리는 완전히 뒤틀려 보조기구를 착용해야 했으며 휠체어에 의존해 이동했습니다. 또한, 통증을 참기 위해 상당량의 모르핀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모리오 수녀는 2008년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루르드를 순례했습니다. 당시 순례를 “은총의 원천”이라고 회상한 수녀는 “신기하게도 성모 동굴에서 성모와 성녀 베르나데트를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녀는 순례 동안 고해성사를 하고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수녀는 “당시 나는 치유를 바라지 않았다.”라면서 “그저 회심하길 바랐고 환자로서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보베에 있는 수녀원에 돌아온 수녀는 특이하게도 몸이 편안해지며 전체적으로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녀는 한쪽 다리를 고정했던 보조기구를 풀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이를 풀었으며,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사용했던 신경자극기도 뗐습니다. 이후 수녀는 어떤 기구의 도움 없이도 걷기 시작했습니다.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루르드 의료국은 모리오 수녀의 치유 사례를 2009년과 2013년, 2016년 3차례에 걸쳐 면밀히 조사했으며, 루르드 국제의학위원회에 이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루르드 국제의학위원회는 수녀의 치유가 “현재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베노아-고닝 주교는 “모리오 수녀가 이렇게 갑자기 완전히 상태가 호전된 것은 기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며 이 사례를 기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사례 중 특이한 것은 63번째로 공식 인정된 기적입니다. 주인공은 비또리오 미켈리(Vittorio Micheli)라는 이태리 사람입니다. 그는 군 복무 중인 22세 때에 좌측 골반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검사를 거친 후 그해 6월 4일에 그의 병명은 치명적인 악성 종양으로 밝혀졌습니다. 일 년 가량 군 병원에 머물며 종양으로 잠식된 엉덩뼈의 머리 부분을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관절은 냉혹하게도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루르드에 순례를 하러 갈 때도 골반에서 발까지 석고 붕대를 하여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샘물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태리로 돌아왔을 땐 외관상 상태가 호전된 것으로 보였고 군인의 신분이었기에 그는 트렌토의 군 병원에 다시 입원하였습니다. 군 병원에서 여러 번 X선 사진을 찍었지만 제대로 판독을 못 해서 의료진은 그의 상태가 이전과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자 그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여 통증이 없어졌으며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료진은 “그의 골반이 뚜렷하게 복구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루르드를 방문했고 루르드 의료국에 의해 “이러한 치유에 대해선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어졌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지 13년이 지난 1976년 5월 26일에 트렌토의 알렉산드로 고따르디 대주교는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으로 특별히 중재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잃었던 시력이 회복되고 암 덩이가 사라지는 것은 참으로 큰 기적입니다. 모리오 수녀 같은 경우처럼 40년 동안 휠체어를 타던 분이 연세가 들어서 두 발로 가뿐히 걷게 된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그런데 비토리오 미켈리 같은 경우 암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요, 그것 때문에 잘렸던 뼈가 다시 생겨나 다리 길이가 같아졌다는 것은 더 기적입니다.
우리 주위엔 크고 작은 기적이 이렇게 존재합니다. 신자들의 기도로 죽었던 사람까지 다시 생명이 되돌아온 예도 주위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묵상하다 보면 믿음이 더 강해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 죽은 우리를 부활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 이 세상을 마치 여행하는 것처럼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우면 이 세상도 즐기지 못하고 나를 해칠까 봐 사람을 평생 두려워하며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리러 가시는 예수님을 붙잡아 시간을 빼앗은 하혈병 여인 때문에 화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 때문에 믿음이 더 증가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 만드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망가진 것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은 분명 다시 만드실 능력도 있는 분이십니다.
작은 치유라도 바랍시다. 이것이 묵상을 통해 부활을 바라는 마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망가진 묵주를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회복 불가능일 때 다시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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