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8-42
38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41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하루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늘 같은 날짜에 오던 용돈이 이번 달에는 오지 않았다며, 혹시 자식이 송금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확인차 전화하신 듯하였습니다. 자식은 바쁜 일 때문에 용돈을 보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하는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 나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별것 아닌 일에 신경 쓰게 했다며 더 미안해하십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자식은 약간의 용돈으로 표현합니다. 받은 사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마음입니다. 설령 그 돈을 받지 못하셨다 해도 부모님은 자식의 마음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어떠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 표징을 보여 주어야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임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려 표징을 일으킨다고 수군거렸던 그들이(마태 12,24 참조), 이번에는 더 큰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실체라면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표징일 뿐입니다. 표징은 실체보다 더 크거나 완전할 수 없습니다. 실체가 있어야 그 표징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표징이 없어도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용돈을 드리지 않아도 안부를 묻는 수화기 너머 자식의 목소리가 부모님께는 또 다른 표징이 될 수 있듯이, 어떤 표징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실체를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표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의지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과 기적이 먼저입니까? 표징을 먼저 요구하는 우리라면, 점집을 찾아가 점을 보고 굿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라며 원망하고 돌아서는 우리는, 용돈을 주지 않는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라며 떼쓰는 철부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표징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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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지옥이라 느낄 때 구원자가 보인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 온 남방 여왕의 예를 드시며 당신을 믿는데 표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겐 니네베 사람들처럼 회개할 마음도 없고 남방 여왕처럼 지혜를 배울 마음도 없다고 질책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니네베 사람들과는 반대로 지금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혜를 배워 구원자를 따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람보의 실베스터 스탤론, 코만도의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동시에 출연하여 탈옥 불가 감옥을 탈출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제목은 ‘이스케이프 플랜’(2013)입니다.
실베스터 스탤론은 탈옥 전문가입니다.
직접 감옥에 들어가 약점을 찾아내 탈출한 뒤, 탈출 불가능한 감옥으로 재설계해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감옥을 탈출하면 50억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선불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스탤론은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괴한의 습격을 당하고 눈을 뜬 곳은 얼굴을 가린 채 중무장한 교도관들이 있으며 24시간 감시되는 유리로만 만들어진 수감방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간수들 마음대로 사람도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제 스탤론은 돈은 둘째치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 감옥을 살기 위해 탈출해야만 합니다. 이때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입니다. 가까스로 탈출한 스탤론은 깜짝 놀랍니다. 그 감옥은 땅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서 계속 움직이는 커다란 배였던 것입니다.
남은 중요한 일은 자신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조 헬기를 요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아널드가 도와줍니다. 결국, 둘의 협동 작전으로 둘은 감옥을 탈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널드의 딸이 자신에게 50억을 주며 탈옥을 부탁한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탈옥을 가장 잘하는 스탤론을 그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스탤론은 그 불가능한 곳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감옥이 그가 쓴 책대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감옥이라 그 약점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탈옥이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감옥에서 수감자들은 당연히 그 압제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줄 압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 감옥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스탤론에게 희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널드는 그에게 희망을 둡니다. 왜냐하면, 탈옥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곳에서 탈옥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탈옥하는 법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은 물고기 뱃속과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커다란 물고기는 자아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법칙을 상징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요나가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된 것 때문에 자신들도 회개합니다. 이 세상이 악에 지배받고 있고 오직 하느님의 명을 따름만이 참 자유의 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요나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세상을 이긴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이 마치 물고기 배 속처럼 무덤과 같은 곳임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그곳에서 탈출할 줄 아셨던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더 무슨 표징이 필요합니까?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무덤과 같은 감옥인 이 세상에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감옥으로 보이는 지혜만 있다면 표징은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죽음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분을 믿고 도와드리면 됩니다. 이 세상이 감옥임을 볼 줄 아는 지혜가 있다면 그 감옥을 설계한 분은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신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영화 ‘아바타’(2009)는 지구가 살기 어려워지자 남의 행성을 빼앗아 자원을 강탈하려는 인간과 자신의 행성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나비족과의 싸움을 그렸습니다.
전직 해병대원이었지만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제이크는 자신의 아바타에 들어가 나비족을 염탐합니다. 그러다 동물들에게 쫓겨 죽을뻔한 여자 아바타를 만납니다.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점점 나비족의 문화에 스며들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간의 탐욕에 맞서 싸우기로 합니다.
하지만 몸만 나비족이 된 배신자 아바타를 나비족은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공격이 거세지자 어쩔 수 없습니다. 믿어보는 수밖에. 그렇게 그는 나비족을 인간으로부터 구원해 냅니다.
이 세상을 악이 지배하고 있고 그 악과 싸워야 함을 안다면 표징은 필요 없습니다. 그 악과 싸우려고 하고 또 그 악을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그분께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실하지 않으니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아와 세상과 사탄과 싸우신 것만으로도 참 지혜이시고 희망입니다. 이 세상이 가라앉는 배, 혹은 그 안에 설치된 감옥임을 안다면 탈출구를 아는 사람처럼만 보여도 무작정 따라나설 것입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고 그 감옥에서 우리가 고통받고 있다면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겨 하늘나라로 탈출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나를 구해줄 자격이나 표징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은 그냥 이 세상이 탈출해야 할 곳이 아니라 천국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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