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코 6,30-34) -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20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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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코 6,30-34) -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2021.7.18.)

by honephil 2021. 7. 18.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면서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인류의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은 어쩌면 더 많은 빵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도와준다는 명분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는 싸움일 뿐입니다. 테러와의 전쟁, 평화 유지를 위한 싸움도 무기를 팔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고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옳은 전쟁과 싸움은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 이래 인간의 탐욕은 전쟁과 폭력을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역사 속의 전쟁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짓밟으며 경쟁합니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고 빼앗기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늘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주위를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 참조)을 행하시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기 전, 예수님께서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쉬고 싶으셨습니다.

 

쉬시며 허기를 달래고 싶으셨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바람에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예수님께서는 쉬실 수도, 허기를 달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피곤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신의 허기를 달랠 빵이 아닌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 시선에서 예수님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빵이 필요합니다. 충분하기보다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이익과 욕심에 주의를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가난하고 아파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들과 함께 나눌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기적의 현장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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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크기가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을 찾아온 이들을 ‘외딴곳’에서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외딴곳에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치셨기에 그들은 음식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빵과 물고기가 많아지는 기적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양 떼를 가르치시는 것을 ‘말씀의 전례’에 비유한다면 그 뒤 빵의 기적은 ‘성찬의 전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는 천상 ‘지식’을 넓히는 시간이고 성찬 전례는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본래 성찬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위해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성체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힘을 잃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체와 성사에 대한 중요성은 매우 강조되는 반면 말씀과 지식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영명축일과 같은 때에 신자분들이 바친 기도를 보면, 미사 몇 대, 묵주기도 몇 단 바쳤다는 것은 있지만, 교리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성경공부나 영성 서적은 얼마나 읽었는지에 대해 나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성체성사를 몇 번 했는지 혹은 묵주기도를 몇 단 했는지만을 강조할 때 그것을 통해 오는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는 간과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영적 지식을 넓혀주시고 성체성사는 단 한 번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리옷 유다는 올바른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에 성체성사를 하고도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습니다.

 

    모든 은총엔 그릇이 있고 사용 설명서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먼저 배운 다음에 그것에 합당한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자동차부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용법도 몰라 낭비되는 은총만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체는 아무리 많이 영해도 그 은총이 제한됩니다. 쥐가 매일 성체를 영한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배운 사람만이 그만큼 은총을 담아갑니다.

 

    미국 플로리다 사라소타의 54세 노숙자 도널드 굴드. 그는 미군 해병대 밴드로 전역 후 음악 교사의 꿈을 꾸며 대학을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학비가 부족하여 다른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결혼하고 잘 살아가고 있었으나 갑자기 아내가 사망합니다. 그 슬픔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고 중독자가 되었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양육권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8년간 길거리에서 남이 버린 빵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눈을 뜨면 지붕이 있고 아침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식당 앞에 놓은 피아노가 눈에 보였고 그의 숨길 수 없는 본능이 살아났습니다. 누군가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SNS에 올렸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노숙자로 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피아노맨 ‘도널드 굴드’는 꿈같은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재활 치료와 함께 노인들을 위한 피아노 연주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음악 대학의 전액 장학금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아들과 재회하고, 미국 4대 스포츠 중 ‘내셔널 풋볼 리그’ 오프닝 피아노 연주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개인 앨범도 발매가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눈을 뜨면 천장에 지붕이 있고 따뜻한 커피가 있다는 게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출처: ‘피아노 치던 노숙자, 정상의 무대에 우뚝 서’, 유튜브 채널, ‘파인딩 스타’]

    

    은총은 그 은총을 담을 그릇에 담겨 우리에게 옵니다. 그 그릇이란 ‘지식’입니다. 만약 도널드 굴드 씨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 이후에 올 새로운 세상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들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배운 것들이 그것에 합당한 세상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그 지식과 합당한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은총입니다.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그 은총의 가치를 깨닫는 지식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전례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지식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놓아야지 성체성사가 참 은총이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죽는 것입니다.

 

    영화 ‘킨: 더 비기닝’(2018)은 고철을 팔아 생활하는 한 입양된 일라이라는 흑인 어린아이가 외계인의 엄청난 무기를 지니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습니다.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백인형을 그 무기로 구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무기는 일라이만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무기는 외계인이 사용하는 무기였는데 일라이도 그 외계에서 온 아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는 성체성사의 효과를 어떻게 자아내는지 잘 알려줍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됨을 배우지 못한다면 성체성사는 그저 비타민의 효과밖에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성체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알게 될 때 그 성체는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이 됩니다.

 

    유튜브 동영상에 색맹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천연색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안경이 개발되어 그것을 선물 받고는 감동하는 동영상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그들이 색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진정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알게 해 줍니다.

 

    말씀의 전례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차원의 세상에 속한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것이 말씀의 전례입니다. 계속 우리가 인간이라고 믿어 행위만 강조하는 강론만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천상 존재가 되게 만드는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게 됩니다. 천상의 존재만 천상의 양식이 은총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리, 성경, 영성의 지식이 쌓이지 않으면 은총을 담을 그릇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https://youtu.be/lWoEvxwY04w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코 6,30-34) -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2021.7.18.)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묵상]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코 6,30-34) -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20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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