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마태오 12,46-50)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202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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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마태오 12,46-50)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2021.7.20.)

by honephil 2021. 7. 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지난 3월 시작된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맞이하여 가정 사목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전남대학교 교수들과 현시대의 가족에 대한 개념과 문제점을 되돌아보고, 교회와 세상 안에서 진정한 성가정을 이루기 위한 노력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그 글은 가족이라는 말에 담긴 이중성을 이야기합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따뜻함과 안정감을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지나친 간섭과 폭력이 당연시되는 단어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내 기대와 욕구가 투사되는 소유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류도향 교수는 ‘혈연에서 관계로: 확장하는 가족의 원리’라는 글에서 가족의 패러다임이 ‘혈연’에서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정 폭력이나 저출산, 이혼 가정과 1인 가구의 증가라는 사회 현상도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가족’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전합니다. 그는 어쩌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부정하고, 그분께서 마귀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킨다는 바리사이와 같이(마태 12,24 참조) 악의적 의도를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새로운 가족을 소개하십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나, 같은 공간에서 함께 먹고 생활하는 공동체, 또는 선택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제대로 실행하는 공동체가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은 공동체입니다. 하나의 구심점으로 같은 삶의 양식을 취하며 서로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무엇으로 하나 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하느님의 뜻’이 여러분의 가족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구심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이며, 차별과 질투가 아닌 배려와 나눔입니다. 오늘도 그러한 여러분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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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욕구는 부여받았고 생존을 위한 것임을 인정한다면 이런 결론에 이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매몰차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중략)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한 가족이 되려면 아버지의 뜻이 있어야 하고 그 뜻을 따르는 어머니가 있어야 하며 또 그 뜻을 따르는 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그런 가정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머니는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자녀는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다 받고 자랄 수는 없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 뜻을 따르지 않고 다른 가정을 원하거나 자녀를 괴롭힌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버리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가정에 면면히 흐르는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뜻’은 하나의 욕구입니다. 욕구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만약 욕구가 저절로 생겨난다면 저는 진화론을 믿을 것입니다. 욕구는 생존과 맥락을 함께 하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욕구도 태어납니다.

 

    생명이 없으면 욕구도 없습니다. 욕구가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생명이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욕구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모 없이 태어나는 생명체 하나만 데려오십시오. 그러면 욕구도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을 믿고 진화론을 따르겠습니다. 저절로 생겨나는 생명도 없고 그래서 저절로 생겨나는 욕구도 없습니다. 모두 부모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욕구에 대해 지금까지 가장 완전하게 정리했다는 사람이 아브라함 매슬로입니다. 그는 욕구의 단계를 두고 아래 욕구가 충족되면 위 욕구로 나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욕구는 ‘생존 욕구’라 합니다. 1단계로 먹고 자는 욕구입니다.
 

2단계는 안전 욕구입니다. 먹을 것이 해결되면 안전한 곳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생존 욕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3단계로 소속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고 합니다. 가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4단계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긴답니다.

   

    마지막으로는 아무리 인정을 받아도 자신이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입니다. 자아실현 욕구는 동물들의 무작정 생존만 하려는 욕구보다 훨씬 고귀한 욕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모든 욕구는 다 생존 욕구이고 이 욕구들에는 단계가 없습니다.’ 자아실현 욕구가 해결되면 생존에 대한 욕구는 해결된 것일까요? 자아실현 욕구를 쫓다가 생존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아실현 욕구도 다 먹고 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존 욕구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히스 레저’를 압니다. 역대 영웅 장르에서 연기상을 받은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조커 역할을 얼마나 잘했으면 처음으로 아카데미에서 상을 주었겠습니까? 이 영화에서 조커를 보면 지금도 꿈에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연기가 완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상식 때 히스 레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이 영화가 개봉하여 엄청난 흥행이 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나 완벽한 내면 연기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흥행 수입을 올리는 스파이더맨의 역할도 거절했습니다. 그는 상도 돈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혼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연기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연기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연기를 통해 자기만족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조커의 연기를 어떤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해 놓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우울증으로 약물을 지나치게 복용하여 숨지고 만 것입니다.

 

    현실이 이런데도 자아실현 욕구는 가장 윗 단계에서 있으므로 생존 욕구가 해결된 상태에서 추구하는 욕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욕구는 생존을 위한 욕구이고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결핍되면 생존에 문제가 생깁니다. 배가 고파 죽거나 외로워 죽거나 자기에게 만족하지 못해 죽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버지의 뜻으로 모인 한 가족입니다. 아버지의 뜻도 하나의 ‘욕구’입니다. 아버지의 욕구는 서로 사랑하여 상대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누군가를 살리는 양식이 되라는 욕구입니다.

 

    이 욕구는 분명 아브라함 매슬로가 말한 생존 욕구와 반대되는 욕구입니다. 분명히 이 욕구를 따르다 보면 이태석 신부님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기는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우리를 죽게 만드는 욕구를 넣어주셨을까요?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모든 욕구는 생존을 위한 욕구이고 그 욕구는 부모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 곧 서로 사랑하라는 욕구는 나를 죽이는 욕구임에도 무엇을 위한 생존 욕구일까요?

    우리는 그것이 육체가 아닌 ‘영혼’임을 압니다. 따라서 육체를 살리려는 욕구를 따르면 영혼은 죽을 것이고, 영혼을 살리려면 육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이 영원히 사는 법을 알려주러 오셔서 십자가에 아버지 뜻을 위해 당신을 죽이셨습니다.

 

    부모가 아니면 생명과 욕구를 넣어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넣어주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는데 바로 가르침과 양식입니다.

 

    이를 하느님께서 주실 때는 진리와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욕구가 들어오고 그 욕구는 육체가 아닌 영혼을 살리는 생존 욕구입니다. 부모가 넣어주는 욕구가 그 생명을 죽이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며 사랑의 욕구를 넣어주셨습니다. 그 욕구는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만들어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가족 공동체가 됩니다.

 

모든 욕구는 주어진 것이고 그 욕구를 받으면 그 욕구를 준 부모만큼 삽니다

 https://youtu.be/4VF6ytluOgY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마태오 12,46-50)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2021.7.20.)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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