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마태오 12,14-21) -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202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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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마태오 12,14-21) -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2021.7.17.)

by honephil 2021. 7. 17.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과 삶의 경험치에 따라 누군가의 행동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한 판단이 반드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 주는지가 기준이라면 그러한 판단은 보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오랜 친구나 사랑하는 이를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한 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의 처지에서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고민해 볼 것입니다. 함부로 내린 판단이 우리를 미움과 오해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그동안 율법을 통하여 얻었던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빼앗아 가려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없앨 모의’를 합니다. 군중들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좋은 사람’ 또는 ‘필요한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릅니다. 그렇게 그들은 쉽게 열광하지만,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그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돌아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쉽게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 것을 ‘함구령’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주님의 종’에 대한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고, 행복보다는 불행과 아픔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때, 절망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원망만이 남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쉽게 판단해 버리는 나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가치,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원망이 아닌 희망으로 그 시련과 아픔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오늘도 그렇게 주님 안에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노력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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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라고 해 라는 말이 희망이 될 수 없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희망’의 상징으로 나오십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와 연결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시는 ‘함구령’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조용하면서도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표현됩니다. 함구령은 아무래도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큰 사람으로 인식되어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분이 되지 않으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모함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18세기 빈부격차가 심했던 프랑스 사회에서는 빵을 구할 수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라는 말로 평민들이 분노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월세가 힘들면 전세를 살면 되고 전세가 힘들면 집을 사면 되지 않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려거든 같은 처지가 되거나 더 낮은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희망을 품게 되지만 태생부터 자신들과 다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무슨 위로의 말을 하더라도 그건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성자께서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신 이유가 이것일 것입니다.

 

    제 유튜브 채널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너무 현실의 사람들과 별개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들이 더는 신자들의 희망이 될 수 없고 그들이 하는 말에 공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020년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신임 총장이 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은 정의를 외면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 양들이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도 눈 귀 입을 닫은 목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직장 상사에게 굴욕을 당해 본 적도 없고, 자기 방 청소며, 자신의 옷 빨래며, 자신이 먹을 밥 한번 끓여 먹으려고 물에 손 한 번 담가 본적이라곤 없는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결하고 영성적인 말씀들이 가슴에 와닿을 리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외면하고, 제도교회의 사리사욕에만 몰두하는 목자 아닌 관리자들이 득실거린다. 고급승용차, 고급 음식, 골프, 성지순례(해외여행)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부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자신이 부자이며 특권층이 되어버린 그토록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주교문장에 쓰인 멋스러운 모토와 그들의 화려한 복장, 가슴 위의 빛나는 십자가를 수난과 처참한 죽음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도무지 연결시킬 재간이 없다.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 걱정이며 지나치게 기름진 그들의 미소와 생존의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한,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 역시 그리 가난하지가 않다.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된 공간에서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대접을 받고 산다.

 

    어딜 가도 수녀님, 수녀님 하면서 콩나물 값이라도 깎아주려는 고마운 분들 속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덥석덥석 받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간다. 말만 복음을 쏟아 놓았지 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며, 아기를 낳아보고, 남편 자식 때문에 속 썩고, 시댁 친정 식구들에게 시달리며 인내와 희생을 해본 적이라곤 없는 탓에 철딱서니 없는 과년한 유아들이 없지 않다.

 

    수도복 입었다고 행세할 무엇이 있었던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신생활에 자랑할 무엇이 있었던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수도복과 수도 생활, 독신생활조차 그 의미가 희석된다.

 

    교구, 본당, 수도회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세상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변명하고 책임 회피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함부로 훼손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정치사회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수도자들이라도 결집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수도자들이라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가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나 역시 작은 수녀에 불과하고 비겁하며 합리화하고 회피하고도 싶다. 내가 비판한 사람들 못지않게 비판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의식으로 인해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서 침묵을 택하고도 싶다.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이 내 심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서고 있다.”

 

    정말 가난하게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은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처럼 살지 못하는 저 자신으로서는 이분이 비판하는 모습이 저일 수밖에 없어서 또한 머리가 숙여지고 반성이 됩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지금 모습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레이시아도 코로나로 인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부에 기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으면 집에 흰 깃발을 내거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서 먹을 것이 남은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운동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자신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인선 수녀님의 글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제가 흰 깃발을 내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더 가난해지고 더 낮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https://youtu.be/9Y0iukWi1FU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마태오 12,14-21) -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2021.7.17.)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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