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처음 만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매력에 이끌려 설레는 것이지, 진정한 사랑의 모습과는 다를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의 장점과 단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꿈과 목표 등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잘 알아야지만 사랑할 수 있겠지요.
또한 서로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을 공유하고 서로 배려해야 합니다. 상대와 자신의 모습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좁혀 갈 때 사랑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다름을 같음으로 만들어 가려면 상대를 배려하고 내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때로는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서로 닮아 가며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알려 주십니다.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바라시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려 주십니다. 이를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에는 당신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고,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신명 26,16-19 참조)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리와 신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앎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함께 살아가고자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권위를 세워 자신을 드러내려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우리 또한 나름의 규칙과 법을 정해 놓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법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 법이 누구를 위한 법이고 규칙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편하려고, 나에게 위로와 희망과 즐거움을 주려고 만든 법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지키는 법인지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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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안식을 얻는 법: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남의 집 밀이삭을 뜯어먹은 것입니다. 일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당시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겐 죄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유다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도록 조장하는 스승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선 안식일 법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다음 7일째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창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창조 이전엔 왜 안식이 없었을까요?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로 고생하는 우리를 해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안식일 이전에 상태란 이스라엘 백성이 뱀, 파라오라는 압제자로부터 몸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종살이하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란 바로 그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파라오가 아닌 주님이 자신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과 연관됩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런 글을 카톡에 올렸습니다.
“생각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을 안 하고 싶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가 또 다른 생각이 생긴다. 죽으면 생각이 없어질까, 죽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감정은 차갑게 죽었는데 몸이 죽지 못해 생각만 늘어진다.”
- 죽고 싶다는 말은 간절히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中 - 김민재 지음
우리는 몸도 우리 것이고 생각도 우리 것이고 마음도 우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면 사실 몸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아’라는 독재자에 우리가 종살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극입니다.
안식이란 자아의 독재로부터 몸과 생각과 마음을 해방해 쉬게 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종살이하며 지쳐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고 해서 참다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안식일을 지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나이 많은 모든 사람을 추방하라고 명령한 추장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추장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추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람이 없는 가축 방목장 움막에 숨겼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추장이 기상했을 때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기에 기겁을 했습니다. 뱀은 추장을 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움직이면 자신의 힘으로 추장의 목을 조였습니다.
추장은 도와달라 했으나 어느 사람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있는 노인들은 더는 그들 곁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가축 방목장에 숨겼던 그 젊은이는 얼른 달려가 추장이 휘감은 뱀에게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우선 쥐 한 마리를 잡아서 그 쥐를 추장의 방에 넣어라. 네가 쥐를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될 것이다!”
젊은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뱀은 방 안에 들어온 쥐를 보자마자 쥐를 쫓아가기 위해 추장의 목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힘이 센 젊은이들이 뱀을 손도끼로 휘감아 밖으로 던져 쳐 죽였습니다.
추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이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고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계시며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도 늙은 아버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 추장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다시 노인들을 찾아 데려와 공경하도록 하였습니다.
노인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안식이라고 여겼던 추장은 오히려 노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참다운 해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자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당신께 순종하며 쉬라는 뜻입니다. 자아로부터의 쉼, 자아로부터의 탈출이 곧 안식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들과 딸을 잃고 마치 인디언 추장과 같은 복장을 하고 이 상황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송강호 씨 연기를 떠올려봅시다. 송강호 씨는 남의 집에 들어와 마치 자기 집처럼 사용하며 추장이 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집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 숨어 살면서도 그 지하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진정 자유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욕심 없이 일상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돈의 욕심으로 목을 휘감고 있는 뱀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유와 안식이 없습니다. 그 뱀을 제거하는 길은 피자 박스를 접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지하 방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며 그것이 참다운 안식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실제로 돈과 명예의 뱀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에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자기 명예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을 지배하게 내버려 둔 주인이 뱀인데도 본인들은 왕의 자리에 앉아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지배해 주지 않으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자 누군가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주었습니다. 운행이 가능하기는 했으나 조금만 운행하면 엔진오일이 사라지고 냉각수가 끓어서 터지려고 했습니다. 유학시절 로마에서 운행하던 저희 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속도가 줄어서 장거리를 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자동차를 타면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엔진을 갈던가 차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엔진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고 차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나를 수리해서 잘 사용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을 가지라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폐차할 것은 폐차하고 엔진을 갈아야 할 것은 엔진을 갈아야 안식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지배자이신 다윗 왕이시고 우리가 거하는 성전이십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누구도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 내 마음을 빼버리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장착합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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