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20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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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2020.9.3.)

by honephil 2020. 9. 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40년 무렵 로마의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비롯한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은 그는 로마의 고위 공직자를 지낼 정도였으나 모든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590년에 교황으로 뽑힌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교황이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 음악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기고 60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깊은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얕은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얕은 곳은 군중이 몰려들어 누가 누군지도 모른 채 예수님의 말씀이 흩어지고 소모될 뿐입니다. 밤새 어두운 곳에서 어쭙잖은 옹졸함에 파묻혀 헤맬 뿐입니다. 얕은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매번 우리의 인생은 소모적인 갈등과 분쟁으로 지저분해질 뿐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십니다. 깊은 곳에는 물고기가 많고, 물고기를 끌어올릴 사람도 많이 필요합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풍성함과 죄의 고백이 서로 만나는 깊은 곳, 그곳에 대한 묵상을 겸허히 시작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누리려 덤빌 때마다 우리는 얕아집니다. 얕은 곳에서 발버둥 치듯 경쟁하고, 경쟁할수록 우리는 깊고 넓은 풍성함을 누릴 이유와 지향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러다 갑자기 깊은 곳에 놓이면 허우적대며 가라앉습니다. 빈약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얕은 곳에서 살아서인지, 깊고 풍성한 삶에 대한 준비와 이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쟁이라는, 생존이라는 현실에 세뇌되고 마비된 것일지 모릅니다.

죄의 고백은 자신의 얕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희망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죄의 고백입니다. 더불어 죄의 고백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세상에는 많은 이들이 많은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당연한 현실로 주어져 있습니다. 굳이 경쟁하지 않아도, 굳이 일등을 하지 않아도 저마다 누릴 풍요로움이 예수님 덕분에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천국이라 하지요. 천국은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노를 저어 나가는 죄인들의 회개로 이루어집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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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소리와 주님의 목소리 구별하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타시고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배는 보통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좁게는 우리 각자 자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것이 하느님의 목소리인가?, 내 목소리인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자신의 목소리를 따를 때의 극단적인 모습과 또 오늘 복음 말씀에서의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를 때의 상황을 비교하며 내 안에서 울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른힐 레우뱅의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에서는 저자가 어떻게 자아의 목소리에 휩쓸려 조현병까지 가게 되었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 안의 자신의 목소리를 ‘선장’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배에서의 선장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선장으로 할 때 어떠한 모습인지 레우뱅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레우뱅이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할 때 이 고민을 멈추게 해 준 장본인이 자신 안에서 울려오는 ‘선장’의 목소리였습니다. 선장은 레우뱅이 다시는 혼자가 되도록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냥 자기만 믿고 따르면 된다고 했습니다. 선장 없이 떠돌던 배 위의 작은 아기는 그 선장의 말에 솔깃했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숙제를 조금 더 하는 게 좋겠다”라고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레우뱅은 한 번 더 했습니다. “아직도 별로인데”라고 선장이 말했습니다. “내 말을 믿으라고. 아직 좋아지려면 멀었어. 한 번 더 해!” 레우뱅은 선장을 믿었기에 숙제를 다시 했고, 참고 서적에서 다른 사례들을 찾아 전체를 한 번 더 매끄럽게 수정했습니다. 참고로 레우뱅은 조현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일정 기간은 우등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만족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직이야. 넌 진짜 멍청하구나. 내가 옆에서 도와주기에 망정이지. 한 번 더 해.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하라고.” 하지만 더는 무리였습니다. 새벽 4시였고 세 번을 다시 하다 보니 몹시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숙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말했습니다.

“너는 멍청한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해.”

선장은 레우뱅의 뺨을 몇 차례 때렸습니다. 학교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서도 손찌검을 했습니다. 물건으로 때릴 때도 있었습니다. 레우뱅은 분명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이것은 잘못한 자신에게 당연히 가해지는 선장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성적도 곤두박질치고 레우뱅은 정신병원 독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나를 이끌어줄 선장을 찾지 못하면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뱀과 같은 자아가 자신을 조정하게 됩니다. 그릴 믿어버리면 이제 혼자 힘으로는 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어쩌면 밤새 물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크게 반대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우선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내 생각과 반대되면 그것은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자아는 숙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약돌로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홍해를 가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런 분을 의심하고 또 자아에 빠져 병적조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실 때, 깊은 데는 바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에고(자아: ego)의 생각을 수장시키는 곳입니다. 두 선장의 목소리는 항상 반대되기 때문에 한목소리를 따르면 다른 목소리는 죽습니다. 모세의 목소리를 따르면 파라오의 목소리는 죽고, 파라오의 목소리를 따르면 모세를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내 생각과 항상 반대됩니다.

 

      그 목소리를 따르는 과정에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를 선택하든 둘 다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분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지만, 파라오의 명에는 엄청난 노예살이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르면 한 번만 던지면 됩니다.

 

      결과를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자아를 따른 사람은 ‘자책’을 합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그것밖에 못 했다고 자책합니다. 이게 심해지면 자해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랐을 때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해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목소리를 따름은 항상 더 큰 희망을 낳습니다.

우리는 두 선장의 목소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목소리를 선택했느냐는 처음과 과정과 결과에서 모두 명확히 구분됩니다. 내가 지금 따르고 있는 목소리의 선장은 누구인가요?

    

https://youtu.be/k6UPrdIG2io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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