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20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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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2020.9.5.)

by honephil 2020. 9. 5.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루카 복음은 구원의 완성과 그 기쁨을 노래하는 복음입니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더 이상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신 주님을 맞이할 넉넉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애써 가꾸어야 할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 스며든 시간적 배경도 끝자락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것은 추수할 때의 행동이지요. 대개 성경 안에서, 추수는 이른바 종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과도기가 아니라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예전의 약속이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추수’라는 이미지가 밝히 드러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도,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도, 좀 더 나은 내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논박할 이유도 없습니다. 완성의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성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이 부족해 보이고, 아직 멀었다 싶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모두 부자고 성공하였으며, 그래서 값진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행여 누가 배고플까, 행여 누가 울고 있을까, 그래서 행여 누구라도 완성의 시간에 누릴 기쁨의 잔치에서 소외될까 고민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배고프지 않게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그리고 변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뒷배가 아주 든든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넉넉하여 나눌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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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는 사람은 화내기 전부터 화가 나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또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이번엔 안식일에 남의 밀 이삭을 뜯어먹는 예수님의 제자들 때문입니다. 과연 바리사이들이 안식을 참으로 지내고 있는 것인지, 제자들이 안식을 지내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도 화가 나 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안식일에도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요?

 

      ‘tvN 어쩌다 어른’에서 상담학 전문가 ‘권수영 교수’가 나와 강의한 내용 중 ‘분노 조절 못 하는 아빠의 충격적 비밀’에 관한 것을 소개해드립니다.

경제적으로도 유복하고 자녀들도 잘 성장한 평범한 집의 가장입니다. 근데 이분이 권 교수에게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 때문이란 것입니다. 차가 깜빡이 켜지 않고 끼어들면 보복 운전을 하고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휴게소까지 쫓아 들어가 폭력을 행사하여 벌금과 구금, 심지어 감옥까지 갈 정도였습니다.

 

      두 자녀에게 물질적 지원은 충분히 했지만,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두 자녀는 각자 방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분은 “너희가 아빠를 무시하는 거야?”라고 하며 급기야 아들에게 손찌검까지 합니다. 그렇게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고, 이혼하기 전에 상담 한번 받아보라고 해서 권 교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상담하던 중, 어린 시절 두번의 큰 상처를 기억해냅니다. 어렸을 때 바쁜 어머니가 큰아들을 묶어놓고 다녔습니다. 그때 엄청난 공포와 좌절, 분노 등이 자신에게 내재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은 엄마가 외삼촌에게 애가 말을 안 듣는다고 혼내주라고 하였습니다. 외삼촌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흙탕물에 들이박고 숨이 멎어서 죽기 직전까지 가게 체벌하였습니다. 이 두 사건이 그의 심장에 커다란 분노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권수영 교수는 자녀에게 사과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하였습니다. 자녀도 건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권 교수는 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자신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말하면서도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아직도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는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자녀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자신이 싫었을 것이고, 그렇지만 그렇게 한 이유를 제대로 보게 되어 마음이 편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더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군대 가기 전 아버지와 단둘이 여행을 갔습니다. 그때 아들이 한 번도 못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아빠, 사실 나 중학교 때 자살하려고 했어. 아빠 때문에. 근데 엄마가 불쌍해서 못 했어.”

이젠 아버지가 폭풍 눈물을 흘렸고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나의 상처를 타인에게 털어놓으면 이젠 나는 그 상처의 주체가 아니라 제삼자가 됩니다. 사실 상처는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내 자아가 받은 것입니다. 그 상처 입은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 믿어온 것이 문제입니다.

두 물통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 물통은 상온이고 한 물통은 들어가서 오래 버티기 어려운 온도입니다. 어렸을 때의 상처를 안고 용서가 안 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시 그 고통을 느끼기를 두려워합니다. 거의 온천수의 온도의 물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1도만 더 높아져도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그 1도의 온도를 높일만한 일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이 표출되는 것이 분노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모든 상처를 다 용서하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용서가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용서를 위해서는 ‘피’가 필요합니다.

 

      이철환 작가의 예를 많이 드는데, 태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소매치기하며 사는 청년이었습니다. 동생을 통하여 어머니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말을 듣고도 병실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한 여자의 핸드백에서 돈뭉치를 소매치기합니다.

 

      몇 달 뒤 동생에게 전화가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왜 돌아가셨느냐고 묻자 병원비가 없어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태수는 펄펄 뛰었습니다. 돈 없으면 죽어야 하는 나라, 이러니까 내가 이 꼴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동생도 말합니다. 여자 친구가 찾아오던 결혼자금만 있었어도 엄마를 살릴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것을 소매치기한 장본인이 자신임을 안 태수는 더는 말을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피가 자신의 심장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얻는 것이 ‘안식’입니다.

 

      자기 심장에 그리스도의 피가 떨어지면 두 가지 큰 효과가 일어납니다. 내가 더 큰 죄인임을 알아 용서하게 되고, 또 그 피가 떨어져 죽은 내가 참 내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자아가 나인 줄 알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문설주에 피가 발라진다고 집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당사자임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그렇게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내가 바로 자아였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설설 끓고 있던 물에서 나와 그 물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개미가 물고 뜯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집의 문설주였습니다.

 

      상온의 물통이든, 뜨거운 물통이든 들어가 있지 말고 나와야 합니다. 상온의 물도 오래 끓이면 끓습니다. 나와서 제삼자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끓든 말라버리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참된 안식입니다. 파라오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끓는 물속에서 빼내 주실 분은 나를 위해 피를 흘린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의 구원자요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을 얻은 이는 그래서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https://youtu.be/YqUFayjZZGk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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