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열이 가시고 질병이 사라지는 일은 기적이지요. 삶이 힘들 때마다 성경 안의 기적이 지금 여기서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우리 가운데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럼에도 성경의 기적은 글 속의 이야기일 뿐 우리의 현실 삶과는 연관이 없는 듯 건성으로 읽히고 곧장 잊혀집니다.
다시 묻습니다. 기적은 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다시 곰곰이 따져 봅니다. 열병을 앓던 시몬의 장모, 갖가지 질병을 앓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입니다. 오직 마귀들만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사람들을 서로 멀어지게 합니다.
가까이 가는 이와 멀어지는 이 사이에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기적은 멀리서 가까운 곳으로 모여든 이들이 있어야 일어나는 이른바 연대의 사건입니다. 멀어지고 외면한, 그래서 입을 다물고 떨어져 나가는 곳에는 멸망과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에 가까이 다가가셨고 사람들은 어김없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기적은 풍성히 베풀어집니다. 멀리서 바라는 기적은 요행이고 우연일 테지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신기하겠지만, 기적이 제 삶과 인연을 맺을 일은 없을 테지요.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와 어떤 식으로든 연을 맺고 살아갑니다. 기적은 지금 가까이 있는 이들이 나와 함께 있는 그 자체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지금의 삶에 함께하는 이들과 더욱 가까워지려는 이에게는 매일의 삶이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요. 나의 삶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고맙게 사랑스럽게 함께하다니요. 이렇게나 기쁜 소식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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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하며 자녀에게 순종을 기대한다면?>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 사실 대부분이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 그 부족한 사랑을 내가 만나는 사람, 특히 새로 이룬 가정의 가족들을 통해 채우려 합니다. 특히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통해 인정받고 사랑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자녀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이용당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가 모기처럼 자기 피를 빨아먹고 있는데 그 모기가 엄마라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이용당한 자녀는 커서도 또 다른 모기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 안의 악한 본성을 명확히 지적해주고 그것과 싸우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녀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그 본성을 지적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행위가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심리 상담가 박우란 씨의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에서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하루는 한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이대로 가면 도무지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찾아왔습니다. 항상 열심히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데 충분히 잘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답답하고 불안하고 하루를 견디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어느 선을 넘어갈 수 없는데 그 선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여학생이 그토록 힘들어하는 데는 엄마의 태도에 영향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맡겨놓는 분위기로 말하지만, 딸은 숨이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엄마의 말 안에 모호함이 있었습니다. 엄마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지만, 그 때문에 딸은 더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엄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넌 그걸 하고 싶니? 꼭 하고 싶다면 해. 근데 그걸 진짜 원하기는 하는 거야?”
어느 날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원하는 게 뭐야? 정확히 좀 말해줘.”
엄마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난 그저 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 그게 전부야.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면 돼.”
남들이 하는 만큼은 어느 만큼일까요? 명확한 선을 지어주지 않으니 아이는 답답하기만 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을 따라주고 싶습니다.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주는 밥을 먹고 그것이 고마워 부모의 뜻을 따라주며 여기까지 큰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자녀에게 명확한 선을 그어주고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주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도 자신 안의 선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이 명확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시달릴 때, 예수님께서는 ‘열’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람을 꾸짖지 않고 열을 꾸짖었습니다. 사람 안에다 선을 긋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라져야 하고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 명확히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자아를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또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마귀가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구분하셔도 양심의 가책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자신 안에서 그렇게 선을 긋고 사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신과 자아의 명확한 구분이 되어있지 않는다면 자녀도 그렇게 됩니다.
‘고바라 스즈꼬’라는 사람의 『숨은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즈꼬는 부모로부터 ‘예!’라며 순종하는 것을 가장 큰 덕으로 교육받고 자랐습니다. 요즘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순종하는 자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주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할 수 없다면 주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래야 순종하는 자녀로 키울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선을 긋지 못하면 자녀에게도 그어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아버지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기에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선인지 자신 안에서 먼저 구분하지 못하면 자녀에게서도 선을 그어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먼저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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