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유다 사회는 단식과 더불어 자선과 기도를 통하여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준비를 하였지요. 늘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하느님을 만나 뵙고자 하는 마음은 새로움으로 가득 찼던 것이 유다 사회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는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데 그렇게 완고하고 폐쇄적이었을까요? 누구보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 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데는 그렇게나 더딘 모습을 보여 주었을까요? 유다 사회를 떠나 가만히 우리네 삶으로 시선을 옮겨 와 봅니다. 습관이 되어 편한 하루하루의 삶, 굳이 바꾸지 않아도 무리 없는 삶의 방식들, 애써 찾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는 여유.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는, 어쩌면 더 이상 세상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실천들. 그 속에서 바라고 기다리는 새로움은 실은 묵고 묵은, 더 이상 낡을 수 없을 만큼 닳고 닳아 버린 골동품이 된 것이겠지요. 하느님을 기다린다지만, 실은 케케묵은 제 욕망의 민낯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만남은 헌 것을 버리고 무조건 새로워져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새 것과 헌 것이 만나지 말며, 새 것은 새 것과 만날 수 있도록 식별하고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문제지요. 제 삶이 새롭지 않은데, 새 것을 기다린다는 모순을 깨닫는 것, 삶은 파도의 물결처럼 출렁이고 번잡한 욕망으로 가득한데, 제 삶의 고요를 바라는 황당함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것에서든 헌 것에서든, 태초부터 여태껏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께서 계시는 곳은, 솔직한 모습으로 기쁘게 한잔하는 축제의 장이어야 합니다. 괜스레 저만을 위한 축제를 기다리면서 제 욕망에 젖어 혼자서만 배시시 웃는 철부지는 되지 말아야겠지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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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
사람은 각자 어떠한 시스템 속에 속해서 살아갑니다. 가정이라는 시스템, 직장이나 나라라는 시스템, 혹은 종교 시스템도 있습니다. 시스템은 사람을 담는 그릇입니다. 사람들은 그 시스템 속에서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마인드가 어떻냐에 따라 그 시스템이 오래가기도 하고 자멸하기도 합니다. 시스템 자체를 지키려 하면 자멸하고 그 시스템 속에 속한 사람을 위하면 오래갑니다.
코로나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지금 신천지와 개신교는 큰 시스템상의 어려움을 드러내었습니다. 시스템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다행히 가톨릭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따라 빠른 대처를 잘하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도 그렇게 빠른 시스템 변화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전례와 권력 구조로 여러 종파로 분열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다른 종파들보다는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있는 유연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시스템이 경직되고 상황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게 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속한 시스템을 얼마나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한 나라가 망하는 역사를 살펴보면 좋을 것입니다. 모든 시스템은 같은 방식으로 붕괴하기에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청나라가 망하게 된 예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2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는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습니다. 이 와중에 작은 희망까지 발로 뻥 차게 만들어 결국 청나라의 몰락을 자초한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함풍제의 세 번째 황후 서태후입니다. 함풍제의 첫째 부인은 일찍 죽고 둘째 부인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서태후가 다음 황제가 될 동치제를 낳았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함풍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어린 아들 동치제를 앞세워 수렴청정을 합니다. 청나라는 그야말로 서태후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한편 아편전쟁으로 나라가 꼴이 아닌 상황에서 중국은 양무운동을 시작합니다. 양무운동이란 서양의 신식군사기술을 도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천연두에 걸립니다. 서태후는 그가 아들임에도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먼 조카이자 미성년자인 광서제를 황제로 앉힙니다. 계속 자신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양무운동은 나름 잘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광서제는 서양의 전함들을 78척이나 만들고 신식무기들을 받아들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을 넘보는 일본과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청나라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양무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 서태후는 자신이 별장으로 쓰던 이화원을 엄청난 크기로 확장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돈이 부족하다는 말에 서태후는 해군에 돈 쓰지 말고 그것으로 자신의 별장을 꾸미라고 명합니다. 그러다 막상 전쟁이 발발했을 때, 배는 많았으나 기름이 없어서 시동이 안 걸리고 대포는 있었으나 화약이 없어서 포탄을 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청나라는 일본에 패배하고 맙니다.
이에 광서제는 자신을 황제로 앉힌 서태후를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가 썩으니 군사가 강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렇게 변법자강운동이 시작됩니다. 외국의 정치와 문화, 기술을 도입하자는 운동입니다. 그러나 서태후는 자신의 줄을 이용해 이런 광서제를 몰아냅니다. 개혁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기 하루 전 광서제를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도 죽고 3살짜리 선통제를 왕으로 앉혔는데 그로 인해 청나라에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선통제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습니다. 서태후는 죽으면서까지 나라를 망국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시스템을 변화시키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양과 일본에까지 밀려 그것을 극복해보자 여러 운동이 일어났지만 서태후는 끝까지 변화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떠한 시스템이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유지하려 하는 이유는 그 시스템에 결탁하여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은 상황의 변화보다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에 의해 붕괴합니다.
어떤 집에서는 밥 먹을 때 말을 하면 복이 나간다고 밥 먹으며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 그 자녀에게만 돈을 10원씩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시스템을 지금 상황에도 적용하려 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것은 자녀를 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옳았더라도 지금은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시스템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려던 이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붕괴되면 자신들의 이익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라며 따집니다. 옛 시스템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그들을 나무라십니다. 시스템 안에 담긴 포도주는 발효하면서 변하는데,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부대 안에 갇히게 되면 부대도 터지고 포도주도 버립니다.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만이 시스템을 유연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단체들이 오래 못 가는 이유가 그 창설자의 정신보다는 형식만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창설자가 그것을 만들 때 그 시스템이 맞았을 수 있으나 지금은 시대와 사람이 변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맞춰 변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시스템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단식의 주체가 그리스도이시듯, 시스템의 지향점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변화에서든 유연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득권들의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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