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그분의 권위를 언급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연거푸 두 번 나타나는 예수님의 권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만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지요.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더러운 영은 제 이익과 제 삶의 안위를 행여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의 삶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제 삶의 자리라고 우기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타인의 자리를 맴돌다 그것이 제 것인 양 여기며 기생하는 삶이 더러운 영의 삶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여도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방해꾼일 뿐이며 낯설고 불편한, 그야말로 ‘타인’ 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구별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픈 이를 아픈 이로 보고, 슬픈 이를 슬픈 이로 보며 순수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예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질서와 고유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유하고 존중하며 기념하는 오늘,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움켜쥐기보다, 우리 각자의 눈에 틀어박힌 들보를 빼내고 제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의 눈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 할 것은 ‘예.’라고만 할 수 있는 순수함과 순박함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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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이 섞이지 않은 망치로는 달걀도 깰 수 없다>
좋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말을 해 준 부모가 있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말을 해 준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나쁜 말을 해 줄 수 있을까요? 말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권위’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분명 하느님의 계명을 가르쳤기 때문에 좋은 내용의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엔 권위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좋은 길로 나가게 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에 권위가 있어야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그 권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심리학자로 꼽히는 ‘아른힐 레우뱅’은 10대 시절, 심리학자를 꿈꾸던 우등생이었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환각과 환청을 겪기 시작했고, 그녀의 세상은 온통 회색빛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귀가 이상해졌습니다. 친구가 말하는 소리보다 자신의 신발 끄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다음엔 눈이 이상해졌습니다. 보도블록에서 떨어져 다칠까 봐 건널목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다음엔 자신 안에서 선장을 만납니다. 처음엔 친절한 것 같았지만 갈수록 잔혹하게 아른힐을 몰아쳤습니다. 그러나 친구라고는 내면의 선장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자아에 묶이게 된 것입니다.
정신병원 독방 침대에 묶여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공허함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장은 밥을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밥 대신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정신병원을 몇 번을 들락거리며 수없이 자해하기도 하고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자해와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어서 10여 년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그 원하던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책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치유해 준 것은 당시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조현병은 고질병이니 나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거나 TV를 보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라고 충고했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런 말들은 그녀를 변화시킬 어떤 힘도 주지 못했습니다.
어떤 치료사가 그녀의 두꺼운 기록철을 보더니 “이런 상태라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요”라고 한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치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 차에서 내려 “괜찮아, 좋아질 거야!”라고 하며 그녀를 차로 태워주었습니다. 다른 때는 소리를 질렀겠지만, 그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람들의 작은 친절함이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말들은 강요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따듯함이라고.
[참조: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아른힐 레우뱅, 책 읽는 다락방 J, 유튜브]
오늘 복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나옵니다. 말의 권위는 말의 힘입니다. 그러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이 나오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말의 권위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 한 명의 마음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보다 권위가 있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희망과 믿음을 주는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당신 말씀 안에 ‘따듯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따듯함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의 ‘피’입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말은 어떠한 힘도 없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베테랑 군인들이 희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라이언, 값지게 살아. 값지게... ”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
라이언 부인이 대답합니다.
“그럼요!”
밀러 대위의 한 마디는 라이언의 평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에 피가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다면 그 이유는 그 말씀에 피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를 마귀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피가 섞인 말만이 내 안 마귀의 본성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힘이 든 말씀은 권위가 있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땀을 흘리게 만들지 않는 망치는 달걀도 깰 수 없습니다. 땀과 함께 휘둘러지는 망치만이 권위를 가집니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고 합니다. 말이 따듯해지려면 그 말에 나의 따듯한 피가 섞여야 합니다. 각자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려집니다. 따라서 자기를 살리려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의 말엔 권위가 없고, 자신을 죽이며 이웃을 살리려는 말엔 권위가 있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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