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1-27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꿀벌의 천적인 말벌이 벌집을 습격하면, 일벌들은 도망을 가지만, 파수병 역할을 하는 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덤벼듭니다. 그래서 이런 파수병 꿀벌에게는 ‘각오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수많은 각오를 해야 할 때가 옵니다. 파수병 꿀벌처럼 정말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의 일은 없다고 하여도 크고 작은 희생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파수병 꿀벌들의 각오 유전자를 빌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질문에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가 오늘 복음에서는 오히려 이 각오 유전자가 꼭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에 함구령을 내리신 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의 반석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 보면 믿는 이들의 버팀돌도 오히려 믿는 이들을 비틀거리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생각하다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시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쉽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세를 밝혀 줍니다. 누군가의 발이 걸리게 만들어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바오로의 권고를 각오 유전자로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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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 되지 않으려면>
코로나 재확산에 관련하여 YTN 뉴스에서는 ‘5월 이후 집단 감염 사례’를 말하며, “교회 관련 1,681명, 사찰 관련 92명, 이슬람 종교행사 관련 6명, 성당 관련 0명(7월 원당 성당 사례는 ‘방문 판매 관련’으로 분류)’로 나왔습니다.
가톨릭과 관련하여 집단 감염이 나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고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개신교는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만났습니다. 만남 전날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가 모두 발언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회 등 종교시설을 사업장 취급하지 말아 달라”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는 많은 시민이 교회를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식한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면 일면 일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의 반 이상이 개척교회와 같은 어려운 현실이기에 대면 예배를 금지하면 현실적으로 유지가 힘든 교회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대면 예배를 강행하려고 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라고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주일에 집에서 조용히 예배드리는 것이 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인 것도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걱정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 걱정으로 본분을 잊고 자칫 사회와 하느님께 폐를 끼치는 일까지 벌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나라도, 한 종교도 몇몇에 의해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합니다. 교회를 망하게 만드는 그 몇몇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다 보면 종교도 자기를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백설 공주』의 이야기를 봅시다.
옛날 어느 왕국에 예쁜 공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공주를 낳은 어머니가 곧 죽게 되어 질투심이 강한 왕비가 들어옵니다.
왕비는 요술 거울에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라고 물었습니다.
거울은 “백설 공주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질투심에 가득 찬 왕비는 노파를 시켜 백설 공주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거울은 백설 공주라고 대답합니다. 왕비는 울부짖습니다.
“백설 공주는 내가 죽였어.”
거울은 백설 공주는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백설 공주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왕비님의 질투심입니다. 왕비님 자신이 나이 들고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백설 공주님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백설 공주를 죽이려고 왕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나, 세상 걱정을 없애려고 본래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교황이 되지도 않는 싸움을 위해 십자군을 징집하여 수많은 이교인들을 죽이는 것을 묵인하였습니다.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 수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로마 한복판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조건으로 풀려나기는 했으나 많이 고생해야 했습니다.
프랑스 국왕은 자신들을 영국으로부터 지켜낸 영웅 잔 다르크를 영국인들에게 잡혀 죽게 했습니다. 죄목은 하느님 계시를 사제를 통해 받아야만 하는데 직접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세상 걱정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력으로 자신의 걱정을 해결하려다 보니 역사에 길이 남을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항을 깊이 우려하셨습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가 당신을 위하는 교회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자신을 죽이는 길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짐짓 예수님을 위하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죽기 싫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를 꾸중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서 ‘사람의 일’이란 ‘자기 자신의 안위’와 같은 말입니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결국 세상과 교회에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실 때, 이미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방법까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돈 생각, 먹고 마실 생각, 남을 판단하는 생각 등을 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주님께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세속, 육신, 마귀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 생각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관한 관심’입니다.
주님 뜻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다 망치게 됩니다.
세계적인 외줄 타기 곡예사 칼 왈렌다는 평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줄을 타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인생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기다림일 뿐입니다.”
그는 외줄 타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위험한 곡예를 성공시켜 사람들의 환호성을 자아냈습니다.
그러나 왈렌다는 1978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외줄 타기를 선보이다가 75m 상공에서 추락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에 그의 부인은 한 인터뷰에서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곡예에서 남편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석 달 전부터 그이가 ‘이번에는 어쩌면 떨어질지도 몰라.’라는 말을 많이 했거든요. 또 ‘만약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질문을 자주 했고요.”
어쩌면 그가 목숨을 잃어버린 것은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는 왕비와 같아집니다.
제 역할을 못 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과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전광훈 목사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일보다는 자기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생각을 끊고 주님의 뜻을 찾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청하는 7가지 외에 최대한 생각을 끊읍시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시작은 생각을 못 박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묵상하며 자주 바치면 나 자신을 위한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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