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그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4년 뒤에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2-36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물에빠져들기시작하자, “주님, 저를구해주십시오.” 하고소리를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35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36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가 사마천의 역사책 『사기』에 보면, 어떠한 명의라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여섯 가지 불치병에 걸린 환자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환자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내 병은 내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고 돈과 재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음식을 적당히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며, 네 번째는 음양의 평형이 깨져서 오장의 기가 안정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입니다. 다섯 번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도저히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며,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환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은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을 묘사하면서, 이스라엘을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고 아무도 돌볼 수 없으며 정부들에게 잊힌 백성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이러한 상태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느님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상처의 치유자로 나서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신탁은 마무리됩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상처가 회복되더라도 재발하여 불치병이 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만드신 하느님보다 문자에 얽매여 조상들의 전통을 더 중시하는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들 때문입니다. 이 불치병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입 밖으로 내보낸 데서 비롯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럴싸한 위선으로 ‘하느님께서 심으신 나무의 햇순’(이사 60,21 참조)을 뿌리째 뽑힐 초목으로 모두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불치병은 위선과 아집으로 무장된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치유하시는 의사로 나서시더라도 우리가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결국 죽음의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주님을 만나는 법; 불가능에 도전하라!>
누군가가 저에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본 적 있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머리로, 신학으로만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인격적인 만남의 체험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저는 그때 아직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신학교에서 예수님 음성을 들은 때가 가장 인격적으로 만난 때였던 것 같습니다.”라고만 말했습니다.
도대체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저 역사 안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바리사이-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불가능에 도전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 사람은 물 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뿐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왔어도 아직은 깊이 만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선하신 분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오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청한 이것을 우리도 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저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할 꿈을 꿉니다. 그래서 그 꿈이 이루어지면 비로소 그분이 함께하셨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근래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이룰 꿈은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성취될 것이기에 지금부터 돈을 조금씩 모아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통장은 어느 선 이상은 돈이 넘지 못하게 스스로 그 액수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형에게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성장 가능성이 큰 종목의 주식에 그 돈을 조금씩 넣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을 준비하다 보니 불가능한 것을 청하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라고 하십니다.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한 것은 세상에서 큰 업적을 내는 일이 아니라 우선 자신을 이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것을 알고는 형을 통해 저축하는 일을 멈출 결심을 하였습니다. 사제로서 재물을 모으는 일은 자신을 이기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생존할 만큼만 가지고, 생존할 만큼만 먹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루를 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지, 무조건 세상을 바꾸려다가는 자기 자신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분은 세상을 바꾸려거든 먼저 이불부터 정돈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1996년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제서품 50주년을 맞는 해였습니다. 이때 함께 금경축을 맞는 몇몇 사제들을 초청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였는데,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신 분은 학자셨습니다. 자신이 50년 동안 사제생활을 해 오며 이룬 업적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선정된 분은 알바니아 예수회 사제이신 ‘안톤 룰릭’이었습니다.
다음은 바로 안톤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자비한 종교탄압이 즉각 시행되었고 저의 동료 예수회 사제들에게는 임의 재판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모두 믿음의 순교자로 기쁘게 죽어갔습니다. 마치 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빵이 쪼개어지고 피를 흘리듯이 말입니다. 1946년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미사를 온몸으로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산채로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저의 팔을 벌리고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하는 희생을 원하셨습니다. 저의 사제적 희생 제사는 사제로서의 전 삶을 조롱과, 배척과, 고문과, 감옥살이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아주 추운 외딴 산골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저는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밧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함께 금경축을 맞이하는 여러분들과 아주 다르겠지만 반드시 특이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50년 동안 수천 명의 사제가 오직 사제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박해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들의 경험은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성품 성사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사제는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그의 삶을 바치고 예수님과 사람들을 위해 그의 생명을 내어줍니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님은 자신의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 용서의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한 번에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밤새 기도를 해야 조금씩 마음이 누구러졌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세례와 동시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물 위를 걷고 이 과정에서 가장 확실하게 주님을 만난 사람은 본인 자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용서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물 위를 걸어보아야 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참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저는 이제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루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함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비틀거리며 하루하루 나아가다 보면 물 위를 걷고 있는 저를 발견하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분이 되지 않으면 그분을 온전히 만나지 못합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한 우리의 궁극적 길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을 이기는 불가능의 길을 시작하며 우리도 주님께 청해봅시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영성의 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상]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2020.8.6.) (0) | 2020.08.06 |
---|---|
[묵상]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2020.8.5.) (0) | 2020.08.05 |
[묵상]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2020.8.3.) (0) | 2020.08.03 |
[묵상]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연중 제18주일 (2020.8.2.) (0) | 2020.08.02 |
[묵상]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2020.8.1.) (0) | 2020.08.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