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은 모두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신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졌던 체험을 다시 하게 되리라 상상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야에서 누린 바 있던 하느님의 자애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섭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화답송도 독서에 이어지는 주님의 신탁으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그런 다음 마태오 복음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애를 확인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이민족이라는 출신의 약점을 넘어서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처사에도 끈질긴 구애는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출신이나 병듦의 약점이나 약함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이라는 장점과 강함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바오로 사도의 고백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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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죄가 되나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꼭 외모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 판단해야 합니다. 종교에서는 보통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스탠퍼드 대학’이 설립되게 된 계기입니다.
외아들 스탠퍼드가 일찍 죽자 그의 부모들은 아들이 다니던 하버드 대학에 그의 동상을 세워줄 것을 청하기 위해 갔습니다. 그 답례로 건물 하나를 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의 행색이 초라했기에 총장은 만나주지 않고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부부는 “그냥 우리가 아이 이름으로 학교를 하나 세웁시다.”라고 말하고 하버드를 나와 ‘스탠퍼드’라는 대학을 세웠습니다. 분명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려 해도 잘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절로 평가됩니다. 그 이유는 외모로 평가해야 하는 것은 ‘생존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초식동물이 맹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습니다. 그래서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일도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살아있는 동안 저절로 일어납니다.
‘시부야 쇼조’의 『외모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심리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는 책에 외모를 중시했던 한 유명한 인물이 나옵니다.
“아저씨가 수염을 기르신다면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 보여서 사람들이 모두 아저씨한테 투표할 거예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링컨은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열한 살 소녀에게 이런 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깔끔한 외모를 버리고 수염을 기릅니다. 물론 압도적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전에는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쑥 들어간 볼 때문에 매우 날카롭게 보였지만, 수염을 기르니 그런 특성이 어느 정도 가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일화가 또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급하게 내각을 구성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일일이 사람들을 검토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참모가 한 사진을 들고 와서 “이 사람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링컨은 “음, 인상이 안 좋아. 안 되겠네!”라고 단번에 거절하였습니다. 참모는 “외모만 가지고 사람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이때 링컨은 우리가 잘 아는 한마디를 던집니다.
“남자가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걸세!”
외모에 이렇게 중요성을 두고 산 사람이 그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외모를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잘’ 판단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판단을 ‘100%’ 믿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양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하고 서류 가방을 들고 차가 지나지 않을 때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 청바지 차림에 흩어진 외모로 건너보는 것입니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몇 명이나 그 사람을 따라서 건너는지 보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누구를 따라 사람들이 더 많이 무단횡단을 하였을까요? 당연히 정장 차림의 남성입니다. 이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따라 해야 자신도 안전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판단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며 권위 있는 사람을 판별하는 데 노력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편하고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혼은 ‘빛’을 보려 합니다. 자신을 살리는 것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외모에서 빛을 찾으려 하는 사람은 영혼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이고, 세속적인 면을 보려는 사람은 육체를 살리려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농구장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아무리 돌아다녀도 농구경기에 열중한 사람들은 그 고릴라를 눈치채지 못합니다. 육체적인 욕구가 강한 사람은 그래서 눈이 멀어 빛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오늘 당신 자신이 빛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들 안에서 어둠과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빛을 보는 사람은 ‘높은 산’에 오른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볼 수 있었을까요? 이는 시편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육체도 살려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야 하고, 이는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웬만하면 빛을 많이 품은 사람과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안에서 빛을 보기 위해서는 ‘산’ 위에 오른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위가 올바르고 마음이 깨끗하여 육체적인 욕망에 마음이 쏠리지 않는 사람만이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지 않습니다.
국가기밀정보의 98%는 이미 공개된 정보들을 정리 종합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의 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98%는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빛에 가까운지, 어둠에 가까운지 구별해야 합니다. 다만 나의 눈을 맑게 하여 빛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과 함께 40일을 머문 뒤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합니다.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98%만 신뢰하고 2%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최종 결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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