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20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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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2020.8.1.)

by honephil 2020. 8. 1.

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는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활동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알폰소 주교를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언’이라는 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말하는 예언(豫言)과 신탁을 받은 사람이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과 그 내용을 가리키는 예언(預言)으로 구분하여 쓰입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후자의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보면 때로는 미래의 일도 언급하기 때문에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전자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고 그분 뜻에서 멀어질 때,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진리를 선포해야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은 유다의 대신들과 모든 성읍 주민들의 무서운 변덕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도 그가 성전과 예루살렘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마땅히 처형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율법을 어기고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헤로데를 비난한 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사면도 가능한 임금의 생일날에 오히려 참수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비록 오늘 독서와 복음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들을 감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사명에 충실하였던 예언자들의 신실에 비추어 우리의 말과 행위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망설임 없이 행합시다. 화답송의 시편 저자처럼 예언자로서 겪게 될 고통 속에서도 기도합시다.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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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행복이라는 마약>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될까요? 그 비밀은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에 취해야 삶의 의욕도 생깁니다.


      한 사향노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오는 사향의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사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더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깨진 자신의 몸 안에서 사향의 향기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쫓는 행복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위 사향노루처럼 그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고픔을 더는 채울 길이 없게 되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삶이 행복이라는 미끼로 자신을 연명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마약을 팔 때 우선 몇 번은 거저 줍니다. 그리고 그 맛에 길들었을 때 비싼 값에 마약을 판매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중독됩니다. 우리는 그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이 행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법원은 최근 데보라 짐머만이라는 여성에게 ‘태아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자녀 양육권을 박탈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짐머만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한 파티에 참석해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만취한 상태에서 산욕을 느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신생아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무려 0.2%에 육박했습니다. 산모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해 신생아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습니다. 법원은 함량 미달의 모정에 대해 ‘양육권 박탈’을 선언하고 ‘살인미수죄’를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의 무책임이 한 어린이에게 ‘저능아’라는 비극적인 이름을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행복에 중독된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행복은 죽어갑니다. 사랑에서 오는 행복도 하나의 미끼입니다.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올해 백 세가 되시고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옹은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절제’라고 대답했습니다. 육체의 만족을 절제하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행복과 육체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에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행복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으로 육체가 죽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지, 육체의 행복을 찾아 사랑으로 오는 행복의 목을 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

  

https://youtu.be/AUcBZKyoJws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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