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20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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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2020.7.6.)

by honephil 2020. 7. 6.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은 액자처럼 구성된 이야기입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을 되살리는 이야기 안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가 보여 주는 굳은 믿음과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회당장의 청은 놀랍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신다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회당장이지만 딸에 대한 간절함은 그의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청원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딸을 되살리시어 회당장의 품에 돌려주십니다.

열두 해 동안 병을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에서 벗어나고픈 그녀의 간절함과 절실함은 그녀를 구원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녀의 간절함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에 어떤 화가는 이 장면에서 한 여자가 많은 사람들의 발 사이로 기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의 치유 이야기는 그들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믿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보여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죽음조차도 넘어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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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2020년 7월 6일 월요일

믿음과 구원 그리고 평화 (마태 9, 18 - 26)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 9, 22)

코로나 사태가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나온 시간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를 체험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하지만 잘못된 길인지를 알면서 계속 가는 것보다는 다시 돌아가는 것이 지금은 피곤하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현명한 판단일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나는 못하지만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가능하게 해 주십니다. 믿음은 모든 문제의 해결사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평화로, 끝인 죽음에서 시작인 죽음에로, 좌절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등등의 부정의 언어에서 긍정의 언어의 삶으로 바뀌게 하는 큰 힘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믿음이 바로 구원의 전제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에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마르 5, 34)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참조하면 이 구원은 평화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믿음과 구원 그리고 평화’ 이 세 단어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 져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병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병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바로 죄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딸아” 하고 부르시는 그 말씀이 너무나 다정하게 들려옵니다. 그 순간 동심으로 돌아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집니다. 저 부르심이 바로 저를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복음에 나오는 여인에 대해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라고 간단하게 보도하고 있지만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 치료를 위해서 다 쏟아부었지만 효험은 없이 상태만 나빠졌다 (마르 5, 26 - 27)라고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러한 체험을 많이 합니다. 결국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 여인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빛과 희망을 보게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은 수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계십니다. 이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대단합니다. 앞으로 다가갈 수가 없으니까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갑니다. 예수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는 굳은 믿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 여인이 생각하는 구원은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과는 의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꼬 복음에 의하면 당신에게서 힘이 빠져나간 것을 깨달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 부인은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주십니다.

구원은 바로 평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의 조건은 바로 그 여인에게 있어서는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는 말씀으로도 충분한데 이렇게 길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묵상해 보면, 평화와 육체적인 치유입니다.  즉 그녀는 몸과 마음이 모두가 치유가 되었습니다. 바로 전인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앞에서 여인이 기대한 구원이 육체적인 치유였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몸과 마음의 치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오셔서 피리 부는 사람들과 소란을 피우고 있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러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와 하느님의 언어는 다릅니다. 죽은 것이 자는 것이고 어쩌면 자는 것이 죽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이 아이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일어납니다. 마르코 복음의 말씀을 빌리면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서 “탈리타 쿰!”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는 뜻입니다. 그러자 소녀는 죽음을 털고 즉시 일어나 걸어 다닙니다. 죽음마저도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앞에서의 ‘구원’ 과  ‘죽음에서의 일어남’ 은 같은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탈리타 쿰’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일어납니까? 우리를 죽음에로 이끄는 모든 자기중심적인 삶으로부터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삶으로 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제약하는 모든 자기중심적인 요소들로부터 하느님께로 나아감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일어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탈리타 쿰” 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이에 응답하는 거룩한 하루 지내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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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 있게 죽는 것이 나을까요, 의미 없이 사는 게 나을까요? 만약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의미 있게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사느냐입니다. 그리고 그 사는 이유가 있는 곳이 ‘집’이 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시어 20일 만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집에 가자!”라고 하셨습니다. 집에는 왜 가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집에 가면 하루를 살아도 의미가 있고, 병원에서는 의미를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존보다는 의미입니다.

 

      워싱턴주 올림피아 인근 세인트헬렌스산에 살던 헨리 트루먼 할아버지는 1980년 화산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상황임에도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화산 폭발이 임박하자 정부는 화산 근처 모든 사람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할아버지만 끝까지 버텼습니다. 강제로 연행하여 구출할 수도 있었지만, 여론과 할아버지의 연세를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화산이 폭발하였고 할아버지는 16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화산재에 묻혔습니다. 할아버지는 말했다고 합니다.

“이 집이 사라지면 어차피 나도 일주일 내로 죽을 것입니다. 나는 이 집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겠습니다.”

[참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책한 민국’, 유튜브]

 

      할아버지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는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 있게 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모든 삶의 의미는 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의미를 잃고 생존에만 집착하는지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생존에만 집착할 때 사실 건강도 잃고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의미’입니다. 이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찾아낸 결론이었습니다. 사람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기적은 살고 싶다는 희망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완벽하기만 했던 26세의 홀리는 결혼 하였고 사랑을 받았고 케이시라는 예쁜 딸을 출산하였습니다. 그런데 3주 뒤부터 손가락부터 시작하여 몸이 서서히 마비되더니 결국, 마비가 전신으로 퍼져 호흡기 없이는 숨도 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녀에게 희귀 난치병인 GBS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온몸이 마비되기는 했지만, 통증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말하는 능력을 잃어가며 “나 너무 아파!”라는 말만 하였습니다. GBS는 그녀를 서서히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딸 케이시는 엄마의 곁을 지켰습니다.

홀리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딸을 바라보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바라던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 그게 가장 고통스러웠어요.”

 

      사랑해주어야 할 아기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마비된 지 두 달 되던 날 홀리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팔을 움직이고 혀를 움직여 딸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는 딸에게 처음으로 우유를 먹였습니다. 70일 뒤 호흡기 없이 자가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재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양손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딸을 안아줄 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87일째 되는 날 그녀는 간호사들의 도움으로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홀리는 엄청난 투혼으로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고 4달째 되는 날 그녀는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딸 케이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집은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1년 뒤 엄마, 홀리는 마라톤을 완주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고통이 우리를 끝장낼 건지, 아니면 더 강하게 만들 건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출처: ‘딸아이 출산 후 전신 마비된 26세 엄마가 내린 결단’, 포크포크, 유튜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여인을 치유해 주십니다. 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더라도 12년 동안 앓던 병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소녀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시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연히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지 않을까요? 마치 어린이가 부모님께 ‘학교에서 선생님이 꼭 필요한 걸 사 오라고 했는데 설마 돈 안 주시겠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 청하려면 그 청하려는 것이 의미 있다고 믿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건강이나 생명이라면 그 건강이나 생명이 의미 있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의미는 청할 때 모든 망설임을 이기게 해 줄 힘을 지닙니다. 내일 또 살게 해 주시기를 청하고 싶다면 오늘 저녁에 내일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지 적어놓으십시오. 그러면 내일도 주님께서 더 살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확신을 두고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십니다. 그 확신은 내가 청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오늘을 의미 없게 산다면 내일도 살 수 있게 청하는 것은 자신 안에서 힘을 잃게 됩니다.

https://youtu.be/IRz7NLCiOr4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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