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2-38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내로남불.’ 좋은 말도 아니고 교육적이거나 윤리적이지도 않고 더욱이 신앙적이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개인의 입장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용하지 말아야 할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하나의 같은 사건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 못 하는 이가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들려 말을 못 했으니 마귀를 쫓아내자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구마’이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군중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며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말하며 예수님을 비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이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각자의 시선은 참으로 다릅니다. 때로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입장과 시각이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고민하고 판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무엇이 복음적인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시각과 잣대로 사건을 볼 것인지,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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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도 알게 모르게 평균 30번 내외의 불평을 한다고 합니다. 불평은 얼핏 지금의 안 좋은 상황을 바꾸어보려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지금 상황에 안주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남 탓하며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불평이 아니라 반성을 해야 합니다. 불평은 지금 닥친 상황에 나의 탓이 없다고 말하는 책임회피입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1)는 ‘게임 이론’으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실존 인물 ‘존 내시’의 삶을 그렸습니다. 게임 이론은 인간관계 안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며 살 것인지를 수학적으로 풀어내었습니다. 그가 수학자이면서 인간관계에 집중했던 이유는 아마도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수학자였던 그는 어느 날 정부 요원에 의해 암호 해독을 하는 일을 비밀리에 수행합니다. 그런 중에 죽음의 위협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힘이 되어주는 유일한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아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런 상황을 그 친구만 이해해주었고 그의 딸도 존 내시의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믿었던 친구가 배신하고 존 내시를 정신병원에 가두었습니다. 배신감을 느낀 내시는 크게 분노합니다. 자신이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는데 너무 방해가 많은 것입니다. 정신병원에서는 그가 정신분열과 피해망상증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정부 요원이나 친구, 그리고 여자아이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허상이었습니다. 남편의 전쟁놀이에 참다못해 집을 떠나려는 아내 앞에서 그는 차를 멈추어 세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이가 자라지 않아!”
정신병원에서 나온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자아이는 자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세 명의 허상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연구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허상임을 인정했을 때 그것들의 존재가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존 내시는 그것들을 보며 평생을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갔습니다. 자신이 할 일을 하지 않게 만드는 핑곗거리에 자신을 던지는 것을 멈춘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내가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현재의 처지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것은 “나는 나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에 대해 불평하고 그런 하와를 만들어준 하느님께 불평했을 때 그는 죄에서 돌아설 마음이 있었을까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면서 변화할 마음이 없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아담을 그 자리에 계속 두실 수 없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자신들은 마귀의 힘을 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나라도 저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담이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와의 탓도, 주님의 탓도 아님을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반성입니다. 불평하며 동시에 반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불평은 변하지 않으려는 책임회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 이렇게 하라고 권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불평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좋은 일꾼이 되지 못하면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마음에 안 들면 불평하지 말고 남편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본당 사제가 마음에 안 들면 불평하지 말고 더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도록 청하라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신학생 때 거의 무전여행하다시피 하며 우리나라를 조금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포항의 구룡포 성당 유아실에 몰래 들어가서 밤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늦은 밤이라 아무도 없어서 빨리 자고 빨리 나오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모기였습니다. 불을 켜고 모기를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몰래 들어온 것이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비뚤어질 정도로 밤새 모기에 물렸습니다. 어떻게 참았을까요?
“아이, 왜 이렇게 모기가 많아!”
밤새 불평하며 참았습니다. 불평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아무 발전이 없습니다. 그냥 물리면서 버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의 탓은 하나도 없고 그래서 발전도 없습니다. 불평하지 않는 습관을 들입시다. 40일 동안 불평하지 않으면 습관이 된 것입니다. 달력에 동그라미나 엑스 표를 하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습관은 두 번째 천성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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