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연중 제6주일 금요일 (20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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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연중 제6주일 금요일 (2020.2.21.)

by honephil 2020. 2. 21.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4―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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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그네가 눈보라를 헤치며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산길에 쓰러져 동사 직전에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기에는 자신의 처지조차 감당할 수 없다 여기고서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잠시 뒤 다른 나그네가 그 길을 걷다가 쓰러진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나그네는 ‘내가 이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를 업었습니다. 매서운 추위에도 나그네는 그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산을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던 중에 그는 길가에 한 사람이 얼어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보다 앞서간 그 나그네였습니다.


자기 처지만 생각하며 먼저 간 나그네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지만,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그를 업고 간 사람은 죽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쓰러진 사람을 업고 걸었기에 추운 날씨 속에서도 땀을 흘렸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체온을 주고받아 둘 다 살아남았습니다.‘혼자서는 따뜻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도 따뜻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흔히 십자가라는 단어가 나오면 ‘고통’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말미암은 고통, 자신을 위하여 겪게 되는 고통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나누고, 그 안에서 겪게 되는 고통이 십자가입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다른 이도 살리고 우리 자신도 살 수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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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자신을 죽일 무언가를 만났을 때다>
 
복음: 마르코 8,34-9,1

인도의 썬다 싱(1889-1929)은 부유한 시크교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외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으나, 항상 내적인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느꼈습니다. 결국엔 참 진리를 찾지 못하면 죽고 말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그는 3일 동안 단식하며 골방에서 결사적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신이여! 만일 당신께서 살아 계신다면 저를 만나 주소서.”
 
그때 라호라로 가는 밤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갔습니다. 다음 열차는 다음날 아침 5시 급행열차였습니다. “신이여! 만일 다음날 아침 5시 급행열차가 지나가기 전까지 나타나 주시지 않으시면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져 죽겠습니다.”
 
썬다 싱은 목욕을 하고는 다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새벽 4시 30분이 되었습니다. 그때 방문 쪽에서 환한 빛이 비치며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고 양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썬다야!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찾는 길이니라.”
“신이여! 누구십니까?”
“나는 너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니라.”

썬다 싱은 그 순간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이후부터 썬다 싱을 기다리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어내기 어려운 박해와 고난이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위협과 회유를 물리쳐 더 이상 집안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지역, 영국, 스위스, 스웨덴, 독일 등의 유럽과 미국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돌에 맞고, 감옥이나 우물에 갇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맨발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에베레스트를 넘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심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 그는 한 번도 절망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몸이 아파 말을 할 수 없을 때는 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어떠한 소식도 없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는 동방의 프란체스코라 불리고 20세기의 바오로 라 불립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기 부정적인 종교성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부정 위에다가 성 프란체스코의 탁발 전도를 나의 이상으로 삼고 살리라. 죽을 때까지 인도적인 터번에 홍포를 입고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라.”

썬다 싱이 진리를 만나지 못하고 편한 부유층 아들로 살아갈 때가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온 삶이 고통뿐인 복음을 전할 때의 삶이 더 행복했을까요? 우리 각자는 무엇이 더 행복한지 느끼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와 복음’이 들어왔는데도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절로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복음’, 즉 ‘진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 목숨을 먹으며 자랍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래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리 자체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안락함을 유지하려는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싫지만 단식은 하고 싶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리를 품고 목숨을 잃으며 사는 것이 행복하게 보인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던 그 진리가 곧 영원한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국내 최고 재벌 자리에 올랐던 정주영 회장은 성공 비결에 대해 “모든 일을 할 때 목숨을 걸고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80년대 일본 바둑계에서 ‘대삼관’을 차지한 조치훈 기사 역시 늘 바둑의 한 수 한수를 목숨을 걸고 두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목숨을 걸 진리가 있다는 것, 그 복음이 육체적으로는 조금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삶의 의미를 깨우쳐줄 것이고 결국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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