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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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마트에서 버려지는 쓰레기에 관한 텔레비전 뉴스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들은 유통 기한이 많이 남아 있는 유제품을 선호하여서 대형 마트는 가장 신선한 상품을 앞에 진열한다고 합니다. 항상 신선한 것을 판매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주려는 것입니다. 반면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식품들은 어차피 팔리지도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뒤로 밀려났다가 버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쓰레기로 처리되는 빵, 야채, 가공식품들이 엄청납니다.선진국에서는 가축 사료나 에너지 재활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상당수의 나라에서는 말 그대로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버려지는 것들이 식량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너무나 절실한 생존의 음식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볼 때 “부스러기”라는 표현은 배고픈 이들에게는 정녕 간절한 단어입니다. 그 부스러기가 생존을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빵을 먹는 이들은 정작 그 빵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예수님께 청하였던 “부스러기”에도 이러한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응답하시어 그녀의 딸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어 주십니다. 부스러기의 은총이 이렇게 크다면, 도대체 빵의 은총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는 몸소 생명의 빵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빵이 되어 오시는 그분 안에서 우리는 어떤 간절함을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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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발산하는 믿음이 자신을 무엇으로 채울지 결정한다>
복음: 마르코 7,24-3
내가 하는 말이 신기하게도 그대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말이 씨가 된다고 농담으로라도 나쁜 말은 쓰지 않도록 교육합니다.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축적된 인류의 유산이요 인류의 지식이 된 것은 말하는 대로 어찌 그리되는지 몰라도 말하는 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아라비안나이트와 50인의 도적’이야기에서 장정 수십 명이 아무리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던 바위문이 “열려라, 참깨!”라는 한 마디에 열립니다. 또 수많은 가수들의 80%정도는 자신의 히트곡과 같은 운명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흥하는 말씨, 망하는 말투’의 저자 이상헌씨는 심지어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인 이유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겠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과 연관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별명이 ‘백수’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취업이 되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백수라고 받아들이면 어떻게 취직이 되겠습니까?
드봉 주교님의 피정강의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드봉 주교님이 갓 서품 받은 신부에게 어떻게 살 것이냐 물었더니, 한 신부는 행복하게 살 것이라 했고, 다른 신부는 가시밭길을 갈 것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는 것을 보니 한 신부는 행복하게 살고 다른 신부에게는 힘든 일만 벌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고 그 말한 것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 한 마디 잘해서 딸의 병을 고친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선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여기에서 이 여인이 무너졌다면 믿음이 없음이 증명되고 그러면 딸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믿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말은 어떤 믿음에서 온 것일까요? 바로 확고한 자기정체성에서 옵니다. 자기정체성은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이고 그 믿음에서 모든 말들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하느님의 자녀는 안 될지라도 하느님 집의 강아지 정도는 된다고 확신한 것이고 그 확신대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만큼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마치 어부가 던지는 그물과 같습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어떤 물고기들이 잡히느냐가 결정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비판하면 세상으로부터 좋은 것이 올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이든 하느님이든 믿음대로 갚아주십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발산하는 믿음이 자신을 무엇으로 채울지 결정합니다.
오늘 시로 페니키아 여인은 자신을 하느님 집의 강아지처럼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대로 여인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자녀로 여기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은총을 주시겠습니까? 문제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 말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그 자녀다운 은총을 받아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면 자신도 다 할 수 있다고 믿고 시도하고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면 베드로처럼 자신도 걷겠다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원수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 나도 그 원수를 용서할 수 있다고 믿어야합니다. 이런 믿음에 도달했다면 믿음의 말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총을 우리도 다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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