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세계 병자의 날) (2020.2.11.)
교회는 해마다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날은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에서 비롯되었다. 성모님께서는 1858년 2월 11일부터 루르드에 여러 차례 나타나셨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날 교회는 병자들의 빠른 쾌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도 함께 기억하며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더욱 가다듬도록 기도한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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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두고 흔히 ‘정결법 논쟁’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은 율법이 담긴 모세 오경 그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전통에 따라 이어진 관례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쟁점은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말마따나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이들의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요? 전통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뜻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점에 있어 프란치스코 교종(교황)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우리에게 일러 주는 바가 큽니다.
머무르셨던 숙소 비용을 직접 계산하시고, 바티칸의 관저가 너무 크다며 그 대신에 사제들이 묵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십니다. 또 고급 방탄차가 아닌 일반 차량을 타시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시기도 합니다.생각해 보면 프란치스코 교종 께서, 예전 교종들께서 하신 방식 그대로 하신다고 하여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 당연시하던 관례를 다시 복음의 빛에 비추어 과감하게 포기하시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려고 교종께서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습과 규정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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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인정받지 못한다>
복음: 마르코 7,1-13
어느 대학에 시험은 많이 보았으나 성적을 매기지 않던 한 영어 교수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교수님은 첫 시험을 치룬 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볼 때 저에게 좋은 성적을 기대하며 보지 마십시오. 시험은 제가 여러분에게 평가를 받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실력에 점수를 매기십시오.” 그러고는 시험지를 각자에게 나누어주고 각자가 점수를 매겼습니다. 학생들은 그 시험지를 다시 회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점수가 여러분이 저를 평가한 점수입니다. 다음번엔 저를 좀 더 잘 평가해 주시고 시험지는 여러분이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시험은 좋은 점수를 받아 선생님께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선생님을 평가하고 내가 나를 평가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시험성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반 아이들의 성적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이 선생님을 믿고 인정하고 사랑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치르라고 주신 시험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관심이 없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그분이 변하실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을 더 믿고 감사하여 좋은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못 지키는가는 내 스스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체크하는 도구이지 하느님이나 이웃에게 인정받으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관습법으로 하느님의 율법을 교묘하게 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이 있지만 그들은 부모에게 드릴 것이라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더 잘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부모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드리는 예물은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세상에서 창조자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 작은 하느님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창조자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말하기에 그것은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하느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율법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평가했어야 하는데 그것으로 하느님께 평가받으려 했고 이웃에게 평가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저 잘했죠? 이 정도면 인정받을만하죠?”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웃들에겐 “내가 너보다 하느님 마음에 더 드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느님은 제가 이 점수를 받아야만 저를 인정해주시는 군요.”라고 하느님을 판단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점수에 따라 우리를 차별하시는 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듯 자신이 하는 행위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하면 그 누군가가 그 평가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인정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미 인정받으려고 하는 마음 안에 상대를 인정 없는 분으로 여긴다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인정받으려면 결국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율법은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는 도구인데, 율법주의는 그것으로 내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평가받으려는 행위입니다.
퇴계 선생은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큰 그릇이 되라고 건물구조 자체를 공(工)자로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 전관에 ‘박약제’란 현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박약제’란 말의 뜻은 ‘박’자는 박사할 때의 박(博)자이고 ‘약’자는 절약할 때의 약(約)자입니다.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입니다. 이조 5백 년 동안 유교의 예절이 너무 번거로워 백성들의 삶을 위축시켰기에, 퇴계 선생은 지나친 예절의 폐해를 살피고 후학들에게 학문에 더 에너지를 쏟으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율법은 좀 줄이고 복음에 집중합시다. 행위로 인정받으려하지 말고 이미 인정받았다는 복음을 믿읍시다. 인정받았음을 믿을수록 스스로 메기는 율법점수는 저절로 더 높아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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