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0.2.6.)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0.2.6.)

by honephil 2020. 2. 6.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 무렵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 소속의 대학을 졸업한 뒤 수사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 때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1862년 그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이 시성되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단순한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사실 제자들을 파견하려면 적어도 그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마르 8,19-21 참조).
어디 그뿐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한다는 소리에 그러시면 안 된다고 반박하여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습니다(마르 8,33 참조).
또 그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하여 논쟁을 하는가 하면(마르 9,34 참조),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으로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마르 10,37 참조).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파견하십니다.단순하기로는 제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떠나라는 소리에 그냥 떠납니다.
더구나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챙기지 말라시니 그냥 그렇게 합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겪게 될 불편함도, 위험도 많을 터인데 그들은 그냥 떠납니다.사제 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점은 하느님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깜냥보다 더 큰 것을 바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못 합니다.’, ‘안 됩니다.’ 하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제게 단순한 응답을 가르쳐 줍니다.
그 어떤 일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실천인 것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단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재호 루카 신부)



|||||||||||||||||||||||||||||||||||||

  
<복음을 전하려면 적어도 대죄는 짓지 마라>
 
복음: 마르코 6,7-13

어느 날 악마가 한 청년에게 나타났습니다.
“흐흐, 이제 너는 나와 함께 죽음의 세계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 네 재산을 모두 내게 바치든지, 네 누이를 팔든지 아니면 큰 술잔으로 술 열 잔을 마시든지 이 셋 중의 하나를 행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이 말은 들은 청년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을 했습니다.
“어떻게 내 손으로 내 다정한 누이를 팔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인간의 도리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짓이다. 애써 모은 나의 귀한 재물 또한 어찌 네게 줄 수 있겠느냐? 차라리 술 열 잔을 마시겠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술 열 잔을 단숨에 들이마시고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술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이후에도 계속 술을 즐겨마셨습니다. 늘 술에 취해 살던 그는 결국 가장 사랑스런 누이를 팔아넘겼고, 급기야는 재산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악마의 뜻대로 그는 죽음의 세계로 끌려갔습니다.
 
악한 것들 중에 어떤 것만 안 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내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끊으려면 다 끊어야합니다. 적어도 대죄는 짓지 말아야합니다. 대죄는 내 안에서 성령의 귀한 은총을 잃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실 때 힘을 넣어 주셨던 ‘지팡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다른 것은 몰라도 지팡이는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 지팡이는 ‘성령’입니다.

성령이라는 무기를 주시며 파견하시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마치 빛처럼 어둠을 침략해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둠이 가만히 있을까요? 악착같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인 성령의 힘으로 그들을 쳐 이겨야 합니다.

다만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무기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잃느냐면 재물에 집착할 때 잃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혹은 인간적인 애정에 얽매일 때도 잃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아의 욕구이고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성령을 잃게 만드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갈 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막대기도 있었지만 ‘매끄러운 돌 다섯’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사무 17,40 참조). 막대기는 분명 지팡이, 즉 성령님을 상징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이 꺼지는 경우는 육의 욕망에 넘어갈 때입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따라서 지팡이만 있어서는 안 되고 육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통제력도 지니고 있어야합니다. 조약돌 ‘다섯’은 ‘오감’, 즉 육체의 욕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좋은 무기를 주셔도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데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조약돌이 매끄러웠다는 말을 굳이 쓴 이유는 다윗이 그때는 오감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쳐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영혼입니다. 많은 영혼을 주님께 바치려면 내 안에 주어진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 육체의 욕망을 절제하여 적어도 대죄에는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먼저 길러야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단순한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사실 제자들을 파견하려면 적어도 그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마르 8,19-21 참조). 어디 그뿐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한다는 소리에 그러시면 안 된다고 반박하여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습니다(마르 8,33 참조).


또 그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하여 논쟁을 하는가 하면(마르 9,34 참조),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으로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마르 10,37 참조).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파견하십니다.단순하기로는 제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떠나라는 소리에 그냥 떠납니다. 더구나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챙기지 말라시니 그냥 그렇게 합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겪게 될 불편함도, 위험도 많을 터인데 그들은 그냥 떠납니다.사제 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점은 하느님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깜냥보다 더 큰 것을 바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못 합니다.’, ‘안 됩니다.’ 하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제게 단순한 응답을 가르쳐 줍니다.


그 어떤 일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실천인 것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단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재호 루카 신부

 

반응형

댓글